향유 옥합
- kleecounseling
- 2025년 12월 26일
- 1분 분량
2025년 12월 25일
본문: 마 26:6-13
제목: 향유 옥합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 본문이다. 맥락도 마가복음과 동일하다. 요한은 시간적인 맥락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요 12:1). 따라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불과 며칠 앞두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마가는 이 사건의 정황을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라고 밝힌 반면 마태는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라고 기록했다. 마태는 이어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약간의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마가와 동일하게 상황을 기록했다. 마태와 마가는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기록했지만 요한은 이 여자가 "마리아"라고 밝혔다. 요한은 이 식사 잔치가 "예수를 위한"(in honor of Jesus)라고 기록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나눈 유월절 잔치 이전에 일반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잔치로서는 마지막 잔치였음을 말해준다. 요한은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라고 기록하고 곧 이어 기름을 부은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밝혔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이어 11장에 달리 구별하지 않고 "마리아"라고 밝힌 점에서 매우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여인이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임을 알려준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중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였다(눅 10:39, 요 11:5 참조).
마태와 마가는 나병환자 시몬(Simon the Leper)의 집에서 잔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한 반면 요한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고 "거기서(즉 베다니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라고만 밝혔다. 마르다는 그 잔치를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들 중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나사로의 집이었을 가능성을 추정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나병환자 시몬이 나사로와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고 시몬이 나사로의 아버지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엘르아살"(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의 헬라식 이름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거지 나사로와 함께 신약에 두번 등장하는 이름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서였다는 점에서 마태는 나사로라는 이름 대신 유대인들의 흔한 이름이었던 시몬이라는 이름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나병환자였던 시몬이 사람들과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나병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치유받고 건강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어 성경에서 정관사를 붙여서 대문자까지 표현한 것처럼 당시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나병환자였던 시몬"하면 금방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을 만큼 알려진 사람이었다. 나병환자들은 율법에 따라 동네에 살 수도 없고 건강한 사람들과 식사를 할 수도 없었는데 잔치를 연 것은 그가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말해준다. 그의 삶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당시의 나병환자는 사실상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죽은 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병환자 시몬은 잔치를 연 것 외에는 초점의 대상이 아니다. 카메라의 초점은 "한 여인" 즉 마리아에게 향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직감적으로 예견한 것으로 보여진다. 아니면 성령께서 그녀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을 것이다. 제자들은 오늘 본문 바로 앞 2절에서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들과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영적 감수성과 분별력이 있었던 여인이었다.
마태와 마가는 "비싼 값"이라고만 표현했지만 요한은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한 자가 가룟 유다임을 밝히면서 옥합에 담긴 향유의 양과 값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추정하게 한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리아는 귀한 자원을 "허비"하며 "낭비"(waste)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분개했고 그녀를 꾸짖었다(rebuked her harshly). 이들의 반응을 이해함에 있어서 인지치료의 관점이 도움을 준다. 인지치료는 동일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인지하고 해석하는 틀에 따라서 반응하는 감정과 행동이 달라진다고 본다.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a beautiful thing)을 하였느니라"라는 해석하셨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함이니라"(12절). 열두 제자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에 대한 관점과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다. 값비싼 향유를 마련할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와 부활 자체를 현실적으로 내다보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점에서 약 1년치의 연봉에 해당하는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발에 부은 것은 인간적인ㅇ 관점으로 보면 허비하는 것이며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금은 보화보다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몸에 그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고 믿은 마리아의 눈에는 전혀 아깝지 않은 전적인 헌신의 예배(worship: worth+ship)였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리아의 이 헌신의 스토리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말하여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in memory of her)"(13절). 실제로 이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읽혀지고 있다.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서 떡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in remembrance of me)"(눅 22:19)라고 말씀하신 것에 버금가는 말씀을 마리아의 헌신의 사건에 대해서 하셨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깨뜨린 것은 마리아의 삶 전체를 깨뜨린 것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를 귀하게 보는 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자들의 신앙의 선배이자 모델이다. 나 자신이 만약 이 잔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나도 가룟 유다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반응을 비난만 할 수 없다. 가룟 유다와 같은 면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나의 삶에도 반면교사이다. 요한은 가룟 유다의 내면을 나중에 파악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렇게 말함을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라고 입술로 찬송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예수님보다 더 애착하며 중독적으로 매여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모습이다. 박정관의 CCM 가사가 오늘 본문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주님 다시 이 땅 위에 임하실 그 때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날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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