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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충성된 종 vs. 악하고 게으른 종

2025년 12월 23일

본문: 마 25:14-46

제목: 착하고 충성된 종 vs. 악하고 게으른 종


달란트 비유는 기독교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한번씩은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비유이다. 누가복음에도 16절에 걸쳐서 비슷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은 열 므나의 비유로 기록했는데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 바로 다음에 열 므나 비유가 등장한다.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누가는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11-12절)라는 배경 설명을 덧붙였다. 열 므나 비유에서는 귀인은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났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비유는 예수님은 재림하시는 날,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


다섯 달란트 비유는 열 므나 비유와 차이가 있다. 첫째, 달란트 비유에서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돈을 세 종에게 차이가 있게 맡긴 반면 열 므나 비유에서는 열 명의 종이 각각 한 므나(mina)씩 받았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한 므나는 약 3개월치 노동자 품삯이다. 따라서 달란트와 므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금액의 차이가 있다. 금액의 차이가 있고 받은 금액의 차이가 있다.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 책임과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총 여덟 달란트는 타국으로 떠난 주인의 재산이었고 주인은 그 재산을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15절) 위임하고 맡겼다는 점이 중요하다. 주인은 세 종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 능력에 따라 구별해서 맡겼다. 이 주인의 뜻을 존중하며 감사하는 것이 종들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자신의 능력에 맞게 맡겨 주셨다는 점에서 감사한다. 다른 종과 비교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실제로 주인이 돌아와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에게 한 칭찬은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고 동일하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절, 23절).


둘째, 열 므나 비유에서는 왕위를 받으러 떠난 귀인이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장사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는 점에서 달란트 비유와 차이가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 비유의 특성상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아서 생략되었을 수도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16절) 받은 돈만큼의 수익을 남긴 점을 보면 주인이 구체적인 지시를 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했던 점에서 그는 주인의 지시에 불순종한 악한 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성품과 주인의 뜻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에 문제가 있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a hard man)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I know that...)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4-25절). 인지치료의 관점은 이 종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유익하다. 이 종의 자기 틀(self schema), 즉 "내부 스키마"가 부정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주인과 환경을 해석하는 "외부 스키마"가 부정적이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자기 틀이 부정적이면 외부 현실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왜곡해서 해석할 위험성이 높다. 문제는 주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왜곡된 생각과 해석을 함으로써 그는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렸다. 그의 핵심적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주인으로부터의 예상했던 야단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주인이 대하기가 힘들고 까다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인식했다는 점이다. 잘못 이해하고 판단한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된 종이 가졌던 유일한 생각은 받은 달란트를 땅을 파고 감추어 두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약 20년치의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한 달란트의 금이나 은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땅을 파고 묻느라 그는 마음 졸였을 것이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 돈을 훔쳐가지 않았을까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자기패배적인 삶을 산 것이다. "나는 안다"(I know that)고 하는 그 왜곡된 지식이 그를 멸망하게끔 한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해보면 그 종은 진실과 진리되신 주인, 즉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제대로 알았더라면 장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실패의 가능성에 대한 부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했을 것이다.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인이 실패했다고 꾸짖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기쁨과 보람과 평안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며 주인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안다"는 것이 자칫 위험할 수 있음을 교훈한다. 자신의 상태와 주인의 마음과 뜻을 잘 알아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란다. 자신의 스키마가 혹시 부정적인 스키마는 아닌지 타인과 외부 현실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스키마를 갖고 있지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신앙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꼭 필요한 스키마를 갖고 이 세상을 해석하며 저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꼭 필요한 스키마가 없다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이며 마지막 날에 예외 없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꾸중과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30절)는 심판 언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신앙인들이 가진 스키마는 환난과 고통 중에도 즐거워하게 하며 소망을 갖게 하는 능력을 준다고 고백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because we know that...)"(롬 5:3-4). 


달란트 비유에 이어 등장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의 무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임금의 마음과 뜻을 잘 "알고" 살았던 자들이었다. 임금에게 직접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임금의 눈길이 머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공감하며 구체적으로 사랑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린 자를 볼 때 먹을 것을 주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뜨거운 태양 빛 아래에서 목말라 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마실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을 옷을 주고, 병든 자들 보면 돌보고, 옥에 갇힌 자를 보면 방문해서 위로했던 것이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것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임금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행동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알았지만 그들이 섬겼던 자들을 하나님이 동일시한 자들이었다는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 임금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these brothers and sisters of mine)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라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염소로 표상되는 무리들은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라고 심판하시는 임금에게 반문한다. 그들은 임금의 마음과 뜻을 전혀 알지 못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했으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할례가 일어나지 않아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의 뜻을 분별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며 사는 현대인들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이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 1:18-22).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they did not think it worthwhile to retain the knowledge of God)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고 복음의 진리가 빛을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빛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는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차이가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성경 말씀을 유일한 진리의 말씀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은혜가 독자들에게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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