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며 응답하신다.
- kleecounseling
- 9월 12일
- 1분 분량
2025년 9월 11일 저녁
마태복음 6장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소위 산상보훈의 말씀은 1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장 1절을 직역하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셨을 때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그리고 그는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이다. 여기서 그들이 무리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따라 산상수훈의 수신 대상이 달라진다. 사실상 제자들도 열두 제자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좀더 많은 제자의 무리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산상수훈은 4장 후반부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각종 병에 걸린 자들이 찾아와서 고침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가 일차적인 청중이었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나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결과나 열매가 없이 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조차 잘 기경된 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눈이 열린 상태에 있지 못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듣고 소화하고 실천하기에 버거운 말씀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래 전에 미국 어느 Amish 공동체에 속한 학교에서 있었던 총격 사건의 피해자들의 가족들은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족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한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 그대로 원수에게 용서를 베푸는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산상보훈은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미성숙함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서 이타적인 삶보다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입술에서 직접 하신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며 복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복음의 정신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비록 이 말씀이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고 할지라도 모든 믿는 자들이 지향해야 할 신앙생활에 푯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순종하기를 힘쓸 때 신앙이 자라며 마음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며 깊어지는 성장과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근육을 사용할수록 근육이 커지듯이 한발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
마태복음 6장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거나 기도하거나 금식하는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의 눈은 "은밀한 중에 계시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았고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향해 있었다. 연극성 성격장애(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 의 증상 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이들의 경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내면이 허약해서 기분이 다운된다. 마치 온도계처럼 무드가 외부인들의 관심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했다. 겉은 깨끗하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속에는 죽은 시체의 뼈가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이다. 생명력이 없으며 겉만 번드르한 그들의 거짓 영성을 지적한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까지 지칭하셨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겉모습으로 속이는 자들이었고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새 중에서 공작새는 그 무늬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다. 특히 수컷 공작새는 더 화려하다. 우스개 소리지만 털을 뽑고 나면 공작새나 닭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인간도 사실상 그러하다. 창조주 하나님 앞과 말씀 앞에 서면 인간은 여전히 죄성과 더불어 씨름하며 갈등하는 연약한 한 존재일 뿐이다. 외부적인 조건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내면으로는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이다. 이 사실을 잘 인식할 때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서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고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은밀한 중에 행한 행동과 기도를 보시고 들으신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할 때 신자는 위로와 힘을 얻는다. 아울러 은밀한 중에도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화할 때 두려움도 느낀다.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모습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이 모습을 하나님을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무소부재성(ubiquity)과 하나님의 전지성(omniscience)를 삶에 잘 연결해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삶을 살아갈 때 경건한 신앙인의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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