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suffering, no crown
- kleecounseling
- 11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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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7일
본문: 마 19:23-30
제목: No Suffering, No Crown
오늘 본문은 오해될 수 있는 말씀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헬라어 성경을 보니 "어떤 부자"(a rich man)는 천국에 어렵게(with difficulty)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 23절의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 문맥에서 볼 때 부자이면서 권력까지 갖고 있었던 그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뒤돌아간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그 어려움의 정도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정도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대답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낙타도 바늘귀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일까? 물론 우주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런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사람으로는 포기하기 힘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와 같이 큰 걸림돌이 되는 것도 넘어가게 하시며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번이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셨던 예수님이 오늘 이 본문에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귀가 번쩍 열리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한 지파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 오해할만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왕국으로 오해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어지는 20장에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예수님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무리는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 이 자리에서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 아마도 제자들과 똑같이 이해했을 것이다. "영광의 보좌"라는 말이 크게 들렸을 것이다. 영광의 보좌에 앞서 고난의 쓴 잔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 복음은 "no suffering, no crown; no pain, no gain"을 가르친다. 베드로가 표현한 것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과정을 수반한다. 광야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마치 출애굽했던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애굽에서의 옛 자기의 삶이 죽어야 가나안에서의 새 자기의 삶이 펼쳐질 수 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것을 포함한다. 부자 청년은 권력과 많은 재물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보다 그것들에 더 애착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슬퍼하며 뒤돌아갔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를 자발적으로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구별짓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 중에는 건강하지 않은 이유로 형제 자매와 관계 단절을 한 채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결혼한 후에는 형제 자매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또 결혼 전보다 멀어져야 결혼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덜 끼친다.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하면 부모와의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떠나는"(leave)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성경적인 결혼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 자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청소년기 이후부터 점점 자녀가 독립적으로 구별짓기 할 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건강한 의미에서 구별짓기가 일어나야 한다. 부모도 자식과 거리를 두어야 자녀가 성장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이런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뒤를 좇는 삶의 양식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문맥에서 볼 때 부자 청년이 많은 부분에서 칭찬받을 만한 자질을 구비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물이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걸림돌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자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집이나 전토가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부모나 형제 자매나 자식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유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에 애착되어 있던 원가족의 삶에서 핍박을 받고 심지어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회교권 국가에서 기독교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원가족과 친척, 사회로부터 완전히 매장되는 것을 감수하는 일이다.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의 첫 수신자들이었던 성도들은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받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방인들로서 예수를 믿은 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로마제국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며 "주"(Kyrios)라는 표현을 황제에게만 사용하도록 하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고백하는 것은 거주지, 직장, 친구, 사회적 보호망을 모두 잃고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 어떤 것이든지 포기하며 버리는 사람에게는 "백 배"(개역개정판에서는 "여러 배"라고 번역했음)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삼십 배, 육십 배, 또는 백 배의 결실을 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이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베드로의 질문은 "주고 받는"(give and take) 거래의 뉘앙스를 풍긴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진지하게 질문했던 부자 청년의 질문과 보다 맞닿아 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영생은 "얻는 것"(get)이라고 생각하고 질문한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생명에 "들어가는 것"(enter)라고 표현을 바꾸어 대답하셨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라는 말씀에서도 "들어가는 것"(enter)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땅에 묻히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생명과 영생이 전가(轉嫁)되는 경험을 한다.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내주(內住)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생령(生靈, living being)이 되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게 하신다. 마치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것처럼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갈 때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루었던 것처럼 백배, 천배, 만배, 또는 수억배의 결실이 일어나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 안에 들어오는 자들은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 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신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 말씀은 이어지는 마태복음 20장에서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의 권좌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 하셨던 말씀과 연결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으뜸이 되려면 오히려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정신, 또는 마귀의 가르침과 정반대 되는 정신이다. 스스로 살려고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야 살 수 있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자신보다 낫게 대우하는 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역설적인 진리의 삶을 직접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그 삶의 정신으로 살 것을 요청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 유대인들로서 율법을 받아 살았던 자들이 먼저된 자들이라면 이방인들은 나중 된 자들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바람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은총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제일 나중에 들어가는 자들이 되거나 아예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될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는 많은 재물이 걸림돌이 되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 보다 더 힘들게 되었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교리와 모세의 율법이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저주받은 자로 죽으신 예수가 걸림돌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천국 문에 들어가는 일에 꼴찌가 되고 있다. 바울은 이 구원의 섭리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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