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안수해주신 어린 아이들
- kleecounseling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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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5일
본문: 마 19:13-15
제목: 예수님이 안수해주신 어린 아이들
오늘 본문은 3절의 짧은 분량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이 본문을 다루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마가는 제자들이 아이들을 꾸짖었을 때 예수님이 "노하셨다(he was indignant) "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들은 안고(he took the children to his arms)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라고 좀더 상세하게 기록했다. 누가는 이 아이들이 "어린 아기"(babies)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축복을 받도록 데려온 자들은 아마도 여성들이었을 것이고 유아기의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둘 다 당시 사회문화에서 사람의 숫자에도 포함시키지 않았을 만큼 무시된 부류에 속한 이들이었다. 제자들도 이런 사회적인 통념에 따라서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 제자만 이들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복수의 제자들이 꾸짖었다.그들은 예수님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판단해서 꾸짖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의중을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꾸짖은 것처럼 말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패러다임, 천국의 패러다임보다는 땅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다. 예수님은 이미 18장에서 천국과 관련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3-6절)에서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마치 까마귀 고기를 먹은 양 행동했다. 씨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새가 와서 다 주어먹은 격이 되었다. 그것도 한 명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다수의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도 하지 못한 채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부모들이 자기의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도 꾸짖었을까? 아마도 막무가내로 꾸짖었을 것이다. "애들은 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제자들의 눈이 여전히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천국"의 패러다임이 아닌 "땅"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 부활 사건 이전까지 제자들이 가졌던 천국 개념은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야로서 로마 제국의 압박으로부터 유대인들을 해방하고 왕이 되어 다스리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그 틀에서 볼 때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각각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셨다. 똑같은 내용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나본 적도 없는 세리장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많은 무리가 따라오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보면 예수님은 각 아이의 이름을 이미 아시고 불러주시며 그 아이의 삶의 정황에 맞는 맞춤형 기도와 축복을 하셨을 것이다. 유대 지역에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겠지만 이 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 놓여졌을 때 아이들은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 자락만 만졌을 때에도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흘러나간 것을 예수님이 감지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로운 눈길과 능력이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만약 이 아이들이 아기 정도의 나이에 해당했다면 아마도 이 경험을 나중에 기억하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안수(按手)의 첫 장면은 창세기에서 야곱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등장한다. 요셉은 야곱의 오른손이 장자의 머리에 놓이도록 자리를 배치했지만 야곱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고 왼손을 장자인 므낫세의 손에 올리고 축복했다. 또한 안수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양이나 소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전가(轉嫁,transfer)되는 것을 상징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안수는 "연결짓기"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치료하실 때 손을 얹어 기도하시기도 했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실 때 예수님은 장모의 손을 터치하셨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He touched her hand)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 8:15). 마가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 중의 하나는 안수할 때 병이 나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8). 사도행전에서는 아나니아 선지자가 다메섹에서 사울을 찾아가 손을 사울에게 얹은 상태에서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라고 말했을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고 다시 보게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안수는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통용되는 제도로 자리잡아왔다. 교회에서 임직자를 세울 때 안수해서 임직하는 경우는 목사와 장로 그리고 안수집사의 경우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일곱 집사를 선출하고 임명했을 때 안수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 6:7).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임명할 때 안수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안수하고 임명식을 한 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세우실 때 안수하면서 임명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는 말씀에서 "권능을 주셨다(gave them authority)”라는 표현에서 예수님이 각 사도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심으로써 자신의 능력과 권위가 그들에게 부여되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성을 목사와 장로 또는 안수집사로 안수하고 임직할 것인가에 대해서 현대 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들과 여성안수를 찬성하고 시행하는 교단으로 나뉜다. 필자가 속한 한국 합동교단은 여성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올해 교단총회에서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여성들에게 강도권은 주되 목사안수는 "만 30세 이상의 남자로 한다"는 문구를 교단헌법에 명시하는 것으로 결의를 한 바 있다. 이 안수는 병든 자를 위하여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나 부모가 자녀를 축복하기 위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과 구별되는 안수이다. 일부 사람들은 분별력 없이 안수기도 받는 것을 좋아하며 안수기도를 남용하는 이들도 있다. 안수가 연결짓기 또는 전이(轉移,transfer)의 의미가 있다고 볼 때 안수하는 사람이 영적으로로 미혹된 자일 경우에는 안수받는 것이 위험하다는 점에서 조심하고 신중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손이 아이들의 머리에 놓여졌을 때 아이들은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능력을 덧입는(clothed) 경험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 자기의 아이들이 기도를 받고 안수받기를 원해서 찾아온 부모들은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제대로 보았던 자들이었다. 제자들처럼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고 실랑이를 벌이며 자신의 권력욕구를 드러내었던 모습과 달리 자신의 아이들을 축복해주기를 원하는 소박한 마음과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예수님의 권좌에 오른편,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데려온 부모가 아니었다. 단지 예수님의 축복과 기도를 받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은 복이 있는 아이들이 되었다. 예수님의 손이 자신의 몸에 터치되며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전가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선택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이 경험은 나중에 이 아이들이 커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전도하는 삶을 살게 했을 것이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삼년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과 연결짓기가 되는 소수의 아이들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아이들은 복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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