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이혼
- kleecounseling
-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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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4일
본문: 마 19:1-12
제목: 결혼과 이혼
여러 이유로 결혼이 늦어지거나 결혼을 아예 포기하거나 원하지 않는 미혼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지 아니면 시대적인 조류가 될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안타까운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게다가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지 꽤 되었고 미국도 주에 따라 동성결혼을 합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기독교회에서 인정할 것인가 여부를 두고 미국의 주류교단에 해당하는 미국장로교단(PCUSA)와 미국연합감리교단(UMC)은 이미 교단헌법에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허용하도록 명시하고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반대하는 교회들과 목사들과 교인들은 교단에 속한 개 교회건물과 목사의 연금과 같은 것을 포기하는 재정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교단을 탈퇴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크리스천들과 교회들도 있다. 미국은 최근에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미국인들의 여권에 "남성" 또는 "여성"으로만 표기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려 시행하고 있다. 미국방부에서도 동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 군인들을 법적으로 퇴직시키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부모의 동의 없이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도록 하고 의료보험비까지 지원해주던 바이든 정부의 정책들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법적으로 보완하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오늘 본문은 결혼과 이혼, 독신, 동성결혼, 성전환수술과 같은 이슈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적인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 1절과 2절은 18장과 19장에서 예수님의 말씀 사역을 연결하면서도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장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라는 말씀을 기록하였다. 예수님은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남쪽 유대(Judea) 지역으로 사역 무대를 옮기셨다는 사실을 부각한 것이다. 즉 곧 다가올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예루살렘과 좀더 가까운 유대 지역으로 가셨다는 점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는 이곳에서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라고 2절에서 그의 치유 사역에 초점을 맞춘 반면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는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막 10:1)라고 교육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다. 보완적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3절). 28장으로 이루어진 마태복음에서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리새인들의 이 시험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공모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며 심문하며 마침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을 예고하는 서곡(prelude)과 같다.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언급하신 내용이 마태복음 20장 17-19절에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Is it lawful for a man to divorce his wife for any and every reason?)"라고 올무에 걸리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의롭다"(righteous)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합법적"(lawful)인지 아닌지 물은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모세의 율법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이었고 그 법이 여전히 유효하게 시행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시대가 앞선 창세기 시대에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결혼과 이혼의 원리를 말씀하셨다 (창 2:24 참조). 모세의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모세의 조상이 되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으로 대답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상대화 하셨다. 이 예수님의 대답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씨름하고 있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동성결혼과 성전환수술과 같은 이슈들에 대처하는 성경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본래"(at the beginning)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진화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와 종(種)의 유지와 번식을 위하여 동물과 식물도 암수로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여 만드신 존재가 인간이라고 선언한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짓기가 되도록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선포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구별짓기가 될 때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다. 성경에서 거룩(holiness)의 의미는 "구별하다" 또는 "분리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남자 또는 여자로 구별될 때 전인성(wholeness)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 남자가 여자가 되거나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은 질서(order)가 아니라 무질서(dis-order)이며 죄(sin)라는 것이다. 성(젠더)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성(given gender)이지 인간 스스로 선택한 성(chosen gender)가 아니다. 아담이나 하와는 자기가 성을 선택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남자로 지으시고 하와를 돕는 베필 여자로 지으셨다. 트랜스젠더는 성경적인 성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남성호르몬 또는 여성호르몬을 주사하거나 생식기관을 수술해서 성을 바꾸는 것은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는 인본주의적인 죄악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태 수술하는 의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행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두려움 없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입이 생기는 성전환수술을 하는 의사들과 병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행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에게 양심이 보편적으로 작동하듯이 일반사회에서도 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과 관계없이 역사적으로 동성애는 혐오되어왔고 거부되어 왔다. 미국 정신과에서도 DMS-3까지는 동성애를 치료가 필요한 장애로 간주했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진단명을 뺐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치료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를 범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동성애를 혐오하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는데 성경은 죄는 혐오할 정도로 싫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동성애는 혐오해야 한다.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하나님도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죄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 6:17-19). 하나님은 죄를 혐오하시는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크리스천들은 죄를 혐오하는 것이다. 혐오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혐오하느냐가 중요하다.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 공립학교 교육과정에서 혐오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부 맞는 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단(異端)적인 가르침인 셈이다. 끝이 다르면 이단일 가능성이 크다. 죄를 단순한 장애 수준으로 재명명(re-naming)하거나 아예 정상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성경과 다른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창조시부터 인간을 본성상 동성애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하여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 되었고 질서가 무너져 버렸다. 동성애는 그 무너짐과 깨어짐의 한 증상에 해당한다. 동성애는 원래 창조 질서와 분명히 어긋난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natural sexual relations)을 바꾸어 역리로(unnatural ones)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얼마가지 못해 하나님이 홍수로 온 피조물을 멸망시킬 것을 결정하시고 시행하실 만큼 세상은 죄와 무질서가 꽉 차 있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큰 방주를 짓게 하셨고 방주가 완성되자 그와 그의 가족에게 방주로 들어가도록 하셨다. 그리고 제한된 숫자의 암수 동물들을 각 종(種)대로 보존할 것을 명하셨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창 7:2-3). 하나님의 뜻과 질서는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서 살아가는데 있다. 남성과 여성의 바운더리(boundary)가 흐려져서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은 역기능적인 증상이다. LGBTQ를 비롯한 수십가지의 gender를 구별짓기하는 것은 반성경적인 사상이자 행위이다. 신본적인 사상이 아니라 인본적인 사상이며 마귀가 기뻐하는 사상이다. 특히 젠더 교육을 받아 소위 성감수성에 민감한 아이들과 청년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치적으로 옳음"(political correctness)이 반드시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법은 가변적이지만 하나님의 법은 불변하는 진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법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accountable beings)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계석(boundary stone)을 옮기지 말라"는 율법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 가족별로, 각 지파별로 분배받은 땅의 경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율법이었다(신 19:14, 잠 22:28, 잠 23:10 참조). 이 율법은 오늘날 신앙인들의 삶에 영적으로 적용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는 계명이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비틀고 왜곡하며 불신하게 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에도 마귀는 두번이나 구약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험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물리치셨다.
둘째, 각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땅에서 서로에게 매이는(bound on earth) 관계로 맺어지기 전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짝지어 주신(binding in heaven) 섭리로 맺어진 관계라는 점이다(마 18:18 참조). 신앙인의 삶에는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삶이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특히 결혼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을 믿어야 한다. 여러 남자, 여러 여자와 연결짓기해서도 안된다. 바리새인들은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let no one separate)"라고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라고 올무를 놓으려고 했다. 이때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결혼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지셨던 원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세상에서는 결혼을 사람끼리 맺은 관계로만 여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을 한다. 결혼을 사람 간의 수평적인 약속과 서약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환경적인 변화에 의해서 이 약속을 깰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부이지만 돈이 많은 청년들은 결혼할 때 이혼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재산 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합의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공증을 받고 결혼하기도 한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점에서 세상적으로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결혼관과 가치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결혼식을 예배 형식으로 진행한다. 예배 중에 결혼서약을 할 때 신랑과 신부는 성경에 손을 얹고 보이는 증인들인 하객들과 보이지 않는 증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하기 위해서이다. 결혼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결혼 당사자 두 사람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멍에를 같이 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결혼예배의 목적이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이 나누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다. 이혼을 금지한 것은 결혼한 부부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혼을 쉽게 결정할 때 따라오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여러 이유로 쉽게 아내를 버리는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에게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2:13-16).
결혼은 이 땅에서만 유효한 "잠정적인 대상관계"이다. 특히 신약에서는 결혼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나은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셨다. 구체적으로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라고 대답하셨다. 생득적으로 성기관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는 사람이나 환관과 같이 의도적으로 성기관을 절제한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음을 인정하셨다. 예수님과 바울도 독신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았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결혼이 누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바울은 임박한 종말을 염두에 두고 독신의 삶을 개인적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8).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 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전 7:38).
기형적으로 태어남으로써 성기관이 발달되지 않거나 양성기관을 가진 사람들이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인정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예외적이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과 여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큰 그림이다.동성애를 비롯한 각종 성적 비행은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명시적인 하나님의 뜻을 흐리게 하며 바운더리를 허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진리로 격하시키는 두려운 일이다.
독신자의 경우 여러 형태의 이기적인 동기로 독신의 삶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선교나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독신의 삶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용인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격려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 될 것이다. 결혼율이 낮아지며 이혼율은 높아져 가는 시대적 상황에서 기혼자나 미혼자나 독신자 가릴 것 없이 모든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오늘 본문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진단할 필요가 있다.
셋째, 예외적인 경우 이혼은 허용된다.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외"라는 예외 상황을 인정하셨다. 당시 유대인들 남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었다. 모세의 율법에서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허용한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셨다. 이혼 증서를 써주지 않고서 아내를 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오히려 버림받는 여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혼 증서를 써줌으로써 비록 버림을 받더라도 법적으로 옛 남편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한 남편들의 경우에 이혼 증서도 써주지 않고 남편으로서의 역할도 감당하지 않고 또다른 여성을 배우자로 맞아들여 결혼생활을 할 경우에 옛 아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구속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여성은 남편의 보호가 없을 때에는 사회적으로 약자로 전락했다. 아버지나 남편이 죽어서 사회적 보호망이 약해진 고아와 과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배려할 것을 하나님이 모세의 율법에 명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모세가 이혼 당하는 여성을 위하여 의무적으로 이혼 증서를 써주도록 명령한 것은 최소한의 보호 장치를 제공하는 조처였던 것이다. 그래야 이혼 당한 여성이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음행"이라는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유대 남자들이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차라리)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이 음행한 경우에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할수만 있으면 결혼 관계를 유지하되 배우자의 음행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는 경우에 피해자 배우자에게 출구를 마련해주시는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음행과 간음에만 국한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범위를 현대적인 상황에서 음행과 간음에 준하는 상황에 적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배우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각종 폭력(신체폭력, 성폭력, 언어폭력)이 상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에는 그 결혼의 언약관계는 이미 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배우자에게 폭력을 상습적으로, 고질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짝지어 주신 하나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심각한 죄악이라는 사실을 의식화해야 한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이들 중에도 상습적으로 배우자 폭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이 악행을 멈추지 않으면 자신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는 심판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피해자 배우자에 대한 공감력이 없는 싸이코패스적인 교인은 예수님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거의 마귀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점을 자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생명의 위협을 받아 이미 사고와 정서가 무너져 있는 내담자나 성도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배우자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품고 인내해야 한다고 상담하거나 지도한다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상담자와 목회자일 것이다. 폭력에 방치된 배우자가 자칫 타살이나 자살로 삶을 끝내게 된다면 그렇게 상담하고 목양한 상담사나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미 다루었던 본문인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는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단회적인 폭력이나 사소한 폭력의 에피소드에도 견뎌내지 못하고 쉽게 충동적으로 이혼을 선택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조장하는 것은 또다른 어리석음과 미성숙이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특히 이혼을 고민하는 내담자나 성도를 돕고자 하는 상담사나 목회자는 심리적인 지식과 영적인 지식을 겸비하여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균형있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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