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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인 부자 청년 이야기

2025년 11월 26일 

본문: 마 19:16-22

제목:  반면교사인 부자청년 이야기


오늘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 기록한 본문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더하는 본문이다. 세 성경 기자 모두 본문에 등장하는 이 청년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만한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이 청년이 "어떤 관리"(a certain ruler)였다고 기록했다. 젊은 나이에 유대 사회에서 매우 지위에 있는 정치가였고 부자라는 점에서 그가 누구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 청년은 바리새인들이 시험하려고 던진 질문과 달리 자신이 평소에 씨름하던 진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올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마가는 그가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막 10:17)이라고 기록했는데 그의 태도에서 그의 겸손하고 진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그가 예수님께 그의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과 예의를 갖춘 행동이었다. 아마도 이 청년은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랍비"(선생님)이라고 호칭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선생님의 의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이 랍비였다는 점에서 그의 호칭은 최대의 존경심을 표하는 호칭이었다. 


이 부자 청년이 던진 질문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할 만큼 삶을 살았지만 뭔가 2% 부족함을 인식함에서 오는 진지한 질문이었다. 그는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바리새인들과는 구별되는 진정성 있는 종교인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던진 그의 질문에서 그는 단지 현세뿐 아니라 영생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범인(凡人)들의 경우에는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명예까지 있으면 철학적인 고민이나 신앙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미 배불렀기 때문이다. 갈등이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권력이 있고 재물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왔다는 점에서 범인들과 탁월하게 구별되는 사람이었다. 이 청년은 비록 로마의 속국 상황에서 살고 있었지만 앞길이 탄탄대로처럼 펼쳐진 청년이었다.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 재물과 권력을 젊은 나이에 얻은 행운아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은 자신이 오랫동안 씨름해왔던 진지한 질문을 갖고 예수님께 찾아온 것이다.


앞 본문에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아기들)을 데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축복 기도를 받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아이들을 꾸짖었다. 흥미롭게도 이 부자 청년의 경우에는 제자들이 그를 제지하고 꾸짖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제자들은 주눅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부자이자 권력자였던 청년을 예수님께 서로 안내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야고보 사도가 초대교회에 있었던 모습을 지적한 다음의 본문을 염두에 두면 제자들 자신들도 권력욕이 있었던 상황에서 약간은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는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인간 심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가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1-4). 이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묘사하자면 그가 비싼 외제차를 타고 보디가드까지 동원한 모습으로 왔을 수 있다. 이 때 제자들은 새삼 자신의 남루하고 초라한 모습이 스스로 주눅이 들며 그가 부러웠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물고기를 낚시해서 그 물고기 입에 있던 은화 하나를 가지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세를 내어야 했을 만큼 재정적으로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제자들은 이 부자 청년의 모습이 부러웠을 것이다. 누가 더 크냐고 서로 논쟁하고 예수님의 권좌 옆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두고 서로 마음으로 시기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제자들 역시 재물에 대한 욕구와 미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게다가 이 청년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거의 완벽한 수준을 갖춘 "완벽남"이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시고 제 5계명부터 9계명까지 언급하신 후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부분까지 언급했을 때 그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대답할 만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의 엘리트 청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열번째 계명은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이웃의 것을 부러워하고 탐낼 필요가 없을 만큼 이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가는 흥미롭게도 "속여 빼앗지 말라"는 말씀을 추가했는데 이것은 그가 권력자로서 범할 수 있는 죄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그런 점에서도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만큼  정직성과 도덕성을 갖춘 남자(a man of integrity)였다. 오늘날 이 청년 같은 청년이 있다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들이 존경하며 추앙하는 대통령 정도의 인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찾아온 이 부자 청년은 니고데모와 여러 면에서 연결짓기가 된다. 니고데모는 이 청년과 대조적으로 "밤에" 개인적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 청년은 대낮에 무리들과 동행하고 있는 예수님을 용기있게 찾아왔다. 니고데모도 이 청년처럼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현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 3:2). 니고데모도 이 청년처럼 정치적인 지도자이자 종교적인 지도자였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 (요 3:1). 오늘날로 말하자면 적어도 국회의원 급의 인물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4)라고 말씀하시고 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5-7)라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6)라고 대답하심으로 성경에서 영생과 관련된 가장 핵심적인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바로 회심한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 후반부에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그에게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양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9-40).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he went away sad)"(마 19:22).


이 청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여정에서 예수님과 섭리적으로 만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면 그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오고오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명예롭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고 슬프게도 이 청년은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뒤돌아갔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눅 9:62) 이 청년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듭나지"(born again, regeneration) 못한 채 이전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많은 재물이 그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부자청년처럼 많은 재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서 의존하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비록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들은 실패했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 회복됨으로써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인생을 마무리했다. 안타깝게도 이 청년은 평소에 씨름하던 핵심적인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지만 예수님의 핵심적인 처방 앞에서 실족하고 말았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예수님은 이 청년을 실족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청년이 영생의 길에 들어서기를 원하셔서 그 청년을 가로막고 있던 핵심이슈를 직면시켜주셨다. 예수님은 돌아가는 이 청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긍휼심과 안타까움을 느끼셨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청년의 눈은 열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계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진주이시며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뒤돌아갔던 것이다.  


뒤돌아간 이 부자 청년의 모습은 천사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의 모습과 연결된다. 롯의 아내는 천사의 지시를 어기고 유황불로 불타고 있는 소돔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롯과 아내와 그들의 두 딸은 그들이 그동안 일구었던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하고 "빈손으로"(empty-handed)라도 소돔을 빠져나와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아브라함의 간구를 기억하신 하나님에게 그들의 생명을 건져주시는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그동안 애착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오고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는 반면교사가 되었지만 그녀 자신으로는 불행하게 삶을 마무리해야 했다. 이 부자 청년과 연결되는 또다른 성경인물은 모압으로부터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모압으로 뒤돌아갔던(turned around) 나오미의 며느리 오르바였다. 오르바도 룻 못지 않게 심리적으로나 관계적으로 "충분히 좋은"(good enough) 여성이었다. 그녀도 빈손으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베들레헴으로 귀환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가겠다고 결심했고 행동으로 옮겼던 것을 보면 심리적으로는 현숙한 여인(a woman of noble character)이었다. 마치 율법의 요구 앞에서 거의 흠이 없이 살았던 이 부자 청년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핵심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다. 여호와 신앙에 올인하는 것에서 그녀는 흔들렸고 마침내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녀는 모압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룻기 1장 이후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룻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약속을 받은 바도 없었지만 이방 여인으로서 본토와 아비의 집을 떠났으며 모압의 종교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여호와 신앙에 목숨을 걸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마침내 그녀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룻기"라는 성경이 기록될 만큼 중요한 신앙인물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종하지 않도록 율법이 명시적으로 기록했던 모압의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성경 역사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녀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는 귀한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룻은 "거듭난" 자가 되었다. 모압 여인이라는 옛 신분에서 거듭나서 마음의 할례를 받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멜렉 가문의 기업 무를 자(kinsman-redeemer)였던 보아스와 결혼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헤세드 은총을 누렸고 오고오는 세대의 신앙인들에게 교훈과 도전을 주는 귀한 성경인물이 되었다.


오늘 청년은 무명의 청년으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 땅에서 재물을 누리며 권력을 누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는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했다. 마태는 꽤 알려졌을법한 이 부자 청년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흥미롭게도 거지였던 나사로는 이름을 가진 자로 등장하지만 부자는 무명 인물로 취급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가진 자만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며 명예를 얻으며 권세를 가졌고, 세상 역사책에 기록될만한 이름을 가진 자라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행하며 불쌍한 자라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것은 그래도 가능성이 남아있음을 시사한다. 당장에는 결단하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다시 결단할 수 있는 은혜의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의 모습은 나 안에도 있다. 많은 현대인들과 크리스천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사실상 외형적으로는 이 청년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보다 훨씬 뛰어난 내면적 자질과 품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천국은 자질과 품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은혜를 덧입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자신이 애착했던 대상을 하루 아침에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루 아침에 알코올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독자는 양가감정과 미련과 씨름한다. 부자청년도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꼭 필요함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근심하고 갈등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전혀 갈등을 느끼지 않고 돌아서는 결정을 했다면 그는 정말 "졸부"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평소의 삶의 모습을 볼 때 그는 분명히 졸부는 아니었다.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 모두 이 청년의 나중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니고데모처럼 변화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는지 아니면 옛 삶의 모습대로 평생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많은 재물로 인하여, 그가 가진 권력으로 인해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힘든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부자의 많은 재물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 큰 걸림돌이 되어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가기란 매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을 읽는 나와 독자들에게 도전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let us throw off everything that hinders and the sin that so easily entangles)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fixing our eyes on Jesus)"(히 12:1-2).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가치가 있는 곳이다. 부자인 동시에 권력자였던 이 청년의 시선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재물과 권력에 더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고 뒤돌아가고 말았다. 이 청년도 머리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떨쳐내기 힘든 애착심과 미련 때문에 발걸음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이다. 욥의 고백처럼 적신(赤身)으로 와서 적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외 없이 모든 인생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부인(否認)하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살기가 훨씬 쉽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는 그 약발이 아무리 길어도 이 땅에서만 유효한 "잠정적 대상들"(temporary objects)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이 대부분의 인생들의 자화상이다. 이 부자 청년은 이런 우리에게 "빈손"으로라도 예수님을 붙잡고 가는 인생이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마침내 영생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실패한 모습을 통해 웅변적으로 가르쳐주는 반면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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