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쉬프트 (paradigm Shift)
- kleecounseling
- 9월 22일
- 1분 분량
2025년 9월 21일 주일 오후 묵상하며 쓴 글이다.
본문: 마태복음 9장 14-17절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용어는 내가 남침례신학교에서 박사과정 하면서 미주한인목회자들을 위하여 남침례신학교가 처음 개설한 한국인 목회학박사(Korean Doctor of Ministry) 프로그램의 첫 코디네이터로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중에 미국 신학교들의 D.Min.과정 책임자들이 참석한 컨퍼런스가 시카고에서 열렸을 때 참석하면서 처음 접했던 용어였다. 신학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의 토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마주한 본문을 읽으면서 이 용어가 생각났다. 마태의 집에서 열린 큰 잔치에 예수님과 함께 초대를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함께 식사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여겼던 이들과 식사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문제를 제기했다. 시편 1편의 표현처럼 예수님이 복있는 사람이라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1절)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의인들에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5절)는 말씀을 따르자면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모임에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신앙 패러다임(paradigm)에서는 "구별짓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요 방법이었다. "바리새인"은 속된 것에서 구별된 삶을 지향하는 것에 열정적인 무리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구약에서 "거룩"(holiness)이란 개념은 구별짓기가 특징적이었다. 성과 속을 구별하며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선택받지 못한 이방 나라가 구별되는 것이 거룩의 중요한 면이었다. 그래서 바운더리를 잘 긋는 것이 거룩을 지키는 중요한 원리였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원리가 담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우상숭배 죄에 빠졌다. 그들은 율법을 반복적으로 불순종했다. 정결법, 제사법, 도덕법, 그리고 사회법에 있어서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않았다.
겉으로는 금식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그들의 모순된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잘 고발하였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의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3-7).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시면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신 그 예언에서 금식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예수님은 물리적인 금식을 하지 않으셨지만 금식의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셨음을 이 예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금식 자체는 유익하며 의미가 있는 신앙행위이다. 에스더의 경우에도 수산 성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금식하며 기도할 것을 요청하며 그녀 자신도 사흘 동안 금식한 후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의 부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전에 나아갔다. 그리고 흩어진 모든 유다인들을 완전히 전멸시키려던 하만의 계략으로부터 자기 민족을 구하는데 쓰임을 받았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도 유다인들은 정기적인 금식을 실천하며 회복의 날을 기다렸다.
금식의 전통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본문에서는 흥미롭게도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연결짓기가 되어 소개된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신에게 찾아온 많은 사람들 속에 포함되었던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7-8절)를 맺으라고 외쳤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 행위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옛 패러다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9장의 문맥으로 볼 때 마태의 집에서 열린 잔치 상황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의 식사 가부(可否)에 대해서 문제를 삼았다면 요한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식사 자체를 문제 삼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패턴의 질문을 예수님께 직접 하였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절).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답하면서 사용한 메타포를 요한의 제자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구별되는 그룹이었지만 그들 역시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신부가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라고 말한 의미를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믿지 못했음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옛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과 "신랑"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금식의 이슈에 대하여 대답하셨다. 혼인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은 신랑과 신부와 함께 하는 동안은 금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며 예의라는 것이다. 혼인잔치에서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고 상식적이라는 것이다. 마태의 집에서 열린 큰 잔치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신랑과 함께 하는 혼인집 잔치와 같은 것이었다. 잔치집에서 금식한답시고 슬퍼하거나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신랑과 신부를 모욕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요한의 제자들마저 바리새인들과 함께 신랑이 세상에 빛으로 와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랑이 여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금식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금식해야 할 때가 있고 잔치해야 할 때가 있음을 잘 구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금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며 그 날은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는 그 날에는 금식하는 것이 맞다. 전도서의 표현처럼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때를 하나님은 아름답게 하신다(전 3:11).
예수님의 복음은 새포도주와 같다. 이미 발효가 끝난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어도 부대를 터뜨리지 않는다. 옛 언약과 율법은 구약의 패러다임에서는 유효하며 의미가 있고 그 정신은 새 패러다임과 연결짓기가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보관해야 발효해도 부대가 터지지 않는다.
사도행전 중반부에 해당하는 15장에 기독교 복음 역사의 큰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사건과 결정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1절)라고 이방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사건이 생겼다. 이 때 예루살렘 교회에 바리새파로 있으면서 개종한 어떤 믿는 자들이 이 가르침을 옹호하였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절). 이때 베드로는 율법의 패러다임과 구별된 복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탁월하게 정리해서 말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9-11절). 예수님의 친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리더였던 야고보가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유다와 실라의 편에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으로 이방인 교회들에게 복음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성경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으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 15:24-29). 자칫 새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려다가 부대도 버리게 되고 새 포도주도 쏟아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던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에서 성령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요한의 제자들처럼 되지 않도록 역사하시며 섭리하셨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세계로 전파되는 역사를 이루었다. 만약 십자가의 복음 뿐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면 누룩이 섞인 복음으로 변질되어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바울은 옛 패러다임을 벗어버리고 새 패러다임을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그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 다음의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 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갈 5:9-1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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