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함을 받은 자 vs. 택함을 받은 자
- kleecounseling
- 2025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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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25년 12월 9일
2025년 12월 8일
본문: 마 22:1-14
제목: 청함을 받은 자 vs. 택함을 받은 자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도 등장하는 천국 비유의 하나이다 (눅 14:15-24). 비슷한 말씀을 두번 하신 것인지 아니면 같은 말씀을 저자의 의도가 있어서 다른 맥락에 배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맥락은 이해하기가 쉽다.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신 자리에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눅 14:7) 청함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고 자기를 청한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로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2-14)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오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잔치의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눅 12:15)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잔치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의 내용은 마태가 기록한 비유와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다.
첫번째 공통점은 예수님은 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들이 이미 초대를 받은 자들이었음을 밝혔다는데 있다. 이미 초대받았던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왕이자 왕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천국 잔치가 열렸는데 이들은 정작 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청함을 이미 받은 자들에게 가서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종들을 통해 말했는데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다 거절했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9-13). 둘째, 새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거리나 골목에서 아무나 보이는대로 청해서 잔치에 온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언약 밖에 있었던 모든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선한 자, 악한 자 여부에 관계 없이 초청받은 것이다. 누가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라고 말한 주인의 말을 기록했다. 구약에서는 아론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제사장으로서 직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나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그는 그의 하나님이 음식이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휘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니라 이와 같이 그가 내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레 21:17-23). 제물로 드려지는 동물들의 경우에도 결점이 있거나 흠이 있는 것은 금지하신 정신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특히 자원제의 경우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레 22:19-20). 하나님은 무조건 장애자들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4). 이방인들은 다 흠이 있는 자들이었다.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흠이 없는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며 속죄양이 되심으로써 이방인을 포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체적인 조건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왕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우리 모두에게 제사장이 입는 영적인 에봇을 입혀주신 것이다. 본문의 비유로 본다면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예복을 입혀주신 것이다.
천국의 신비는 천국과 상관없이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 앉아 있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맨먼저 듣고 첫번째로 천국에 들어가는 나라가 된 것이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당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리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3-17).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나타난 것처럼 맨 마지막 시간에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들이 제일 먼저 품삯을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바울은 이 구속사의 역설과 신비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본문 비유에 대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점은 첫째, 누가는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라고 보고했을 때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라고 주인이 대답한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 선교의 의미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마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복음서라면 누가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복음서라는 점에서 본문 비유에서도 특색이 있게 기록했다. 둘째, 청함을 받은 자들의 다수의 반응이 마태복음에서는 극단적이었다는 점이다. 누가는 그들의 반응을 완곡한 거절로 표현했다.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그러나 마태는 한 사람은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는" 반응을 했다고 기록했다. 유대인 수신자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21장 선행 본문에서 포도원 주인이 종들을 포도원 농부들에게 보냈을 때 농부들이 보였던 공격적인 반응과 유사하게 반응했다는 점에서 마태가 오늘 본문의 비유를 누가와는 달리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사건의 맥락에서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해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상의했던 행동에 대해서 마태는 오늘 본문 후에 바로 다음에 기록하였다. 이 사실을 볼 때 왕의 청함을 받고도 종들을 때리고 죽인 자들이 유대인들이며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임을 예수님이 명시적으로 비유하신 것임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셋째, 마태는 청함을 받은 자들에게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도록" 한 임금의 반응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바벨론에 의하여 유다왕국과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멸망한 사건을 의미한다. 동시에 주후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훼파될 것을 암시한다. 넷째, 마태는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이 결혼 잔치에 입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금이 그를 잔치에서 거절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라고 말한 내용을 기록했다. 이런 조치는 마태복음 24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이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악한 종이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여겨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못한 시각에 주인이 와서 그를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4:5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주인이 내린 처벌과 비슷하다. 그리고 25장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내려진 처벌과 비슷하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5:30).
마태는 오늘 본문의 비유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면서 이 비유의 핵심을 지적했다. 청함과 택함은 다르다는 것이다. 청함을 받았기 때문에 나중에 핑계하지 못한다. 오늘날도 복음의 소리는 전파되고 있다. 못들어서 믿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무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 (their voices)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their words)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청함을 먼저 받았지만 잔치에 응하지 않고 불순종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의 말씀에서 "천하 만민"(all nations)이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들만 여호와의 선택함을 받은 선민(選民)의식에 빠짐으로써 결국 천국에서 밀려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순종한 자들도 많이 있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청함을 받은 자들로서 오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구속사의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태어나셔서 유대 땅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천국을 거절했으며 천국으로부터 거절받고 쫓겨난 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선함이나 악함에 관계없이, 또는 할례 여부와 관계없이 예수님의 대속적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는 이방인들은 모두 예수님이 자신의 신랑이 되는 신부가 되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결혼 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온 사람이 내쫓김을 당했다는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이라고 자동적으로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옷을 입은 자들만이 이 나라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만이 이 나라에 들어오는 은혜를 입는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 저는 자, 맹인, 또는 가난한 자라고 배척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자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린 아이나 노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초청하신다. 청함을 받고도 거절한 자들은 이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 나라에 들어온 자들은 택함을 받은 은총을 입은 자들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종들을 보내어 천국 잔치에 참여하라고 초대하신다. 초대가 유효할 때 영접하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방법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지만 성경 말씀대로 믿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잔치에 참여하는 예복을 입혀주신다. 반대로 거절하고 불순종하면 바깥 어두운데 던져지며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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