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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2025년 11월 16일 주일 새벽 

본문: 마 17:22-23

제목: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오늘 본문은 두 절로 이루어진 짧은 본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갈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마태, 마가, 누가 모두 기록할 만큼 의미있는 본문이어서 다루어봐야겠다 싶었지만 한참 본문과 씨름해야 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28절까지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예수님을 꾸짖다시피 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꾸짖으셨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런데 다시 17장 오늘 본문에서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고 두번째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가와 누가 모두 이 본문을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사건 이후에 다루었다는 점에서 짧은 두 절의 본문이지만 중요한 본문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것을 포함하면 최소한 세번이나 예수님이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예견하여 말씀하셨을 때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한 명도 그 의미를 깨닫고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 다른 경우와 달리 슬프고 두려워서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해서는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바리새인들과 별반 차이점이 없었다. 마태는 제자들의 반응을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grief)라는 표현으로 묘사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염려와 근심과 상실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예견하는 애도(anticipatory grief) 과정을 겪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 을 겪는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소식에 불안해 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한 기간은 약 삼년이다. 그 기간은  아기가 태어난 후에 엄마로부터 약 삼년 동안 젖을 먹은 후에 젖을 뗄 때까지 걸리는 기간에 해당된다. 정신분석학에서 아기가 엄마와 애착하며 공감을 경험함으로써 안정된 내적 심리구조물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시기라고 보는 최소한 삼년의 기간과도 연결된다. 대부분의 아기들은 이 시기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경험들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있을 뿐이다. 발달심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제자들은 비록 성인이었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겨우 젖을 뗄 나이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행적을 목격한 영적 아기라고 볼 수도 있다.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말을 해도 "말귀"가 열리지 않아 부모의 심정도 모르고 뜻도 모르듯이 제자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그 길에서 서로 쟁론했다고 마가는 이 본문과 관련된 본문 다음에 기록했다. 즉 제자들은 슬퍼하며 두려워했지만 "동문서답"(東問西答) 또는 "마이동풍"(馬耳東風) 식으로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야로 등극하여 권세를 얻을 것을 염두에 두고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막 9:34)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세번째로 언급하신 마태복음 20장 17-19절의 본문 바로 다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 즉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라고 말하는 사건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음이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We can)라고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임금이 마시는 잔이 아니라 고난의 잔이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잔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열 제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두 제자에게 분노했던 것은 다른 제자들도 두 제자 못지 않게 명예욕과 권력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자들의 모습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연결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들을 목양했고 아볼로가 목양을 했지만 그들의 영적 수준은 "육신에 속한 자" 또는 젖먹이 수준이었다. 십자가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자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 파, 그리고 예수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고전 3:1-4 참조). 그들에게 성령의 여러 은사들이 주어졌지만 실제 그들의 영적 수준은 여전히 젖을 먹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열두 제자들도 삼년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영적 젖먹이들이자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막상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임박했을 때 두려워했고 감람산에서 잠시라도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졸며 잠이 들었고 마침내 다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갔던 것이다.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도했던 세 제자들도 졸며 잠들었을 정도였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호언장담했지만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는 자리까지 나락에 떨어졌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도 좌절한 상태에 있었다. 디베랴 호수(갈릴리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했을 때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 그리고 도마와 나다나엘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할 만큼 제자들의 영적 수준은 여전히 젖먹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요 21:1-3 참조).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4:29). 비록 당시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택한 제자들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올 때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삶의 초기 경험을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해주심으로 젖먹이 수준의 신앙인에서 장성한 수준의 신앙인으로 변화시켜주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교회와 사도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였다. 일반적인 발달심리의 틀과 달리 젖먹이 수준에서 성인의 수준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도록 능력을 입혀주신 전무후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섰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맹인이 눈을 뜨고 똑똑히 보는 것과 같은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정오에 밝은 빛 가운데 또렷한 음성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밝은 빛으로 인하여 육신의 눈이 멀게 되었지만 다메섹에 들어가 사흘 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 선지자가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라고 말하며 안수했을 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 그리고 그는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 머물며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파"할 정도로 놀랍게 변화되었다(행 9:19-20). 예수님의 제자들이 적어도 삼년의 기간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말씀을 듣는 경험을 했던 것과는 달리 바울의 경우에는 한번의 강렬한 "조우"(遭遇, encounter)가 그의 전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라고 그가 고백한 것은 그의 삶의 급격한 변화를 잘 말해준다. 율법학자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몽학 선생(초등교사)과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 율법이 최고인양 알고 살았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율법이 말하고자 했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자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수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사로서 살아가는 신앙 인물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지식으로만 생기지 않는다. 성령이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셔야 거듭날 수 있고 기록된 성경말씀이 소화가 되며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 생겨야 참된 신앙이 생기는 것이다.  머리로만의 지식으로는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갖춘 것 같은데 실상은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이성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기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율법에 능통한 니고데모도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는 진단을 받아야 했다. 거듭나야 영적 눈이 열리며 귀가 열리며 마음이 열린다. 천국이 그 마음에 임한다. 성령이 내주하시며 역사하신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신앙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고 패러다임이 바뀐 제자들이나 다메섹 사건을 경험하고 패러다임이 바뀌었던 바울처럼 하루 아침에 신앙이 쑥쑥 자라서 장성한 신앙의 대장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그런 신앙인들이 예외적으로 있다. 신앙생활의 연조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은혜를 입은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도 조심할 점은 그 변화가 지속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리적인 성숙과 영적 성숙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성숙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채 영적인 은사나 능력을 강조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 호세아 선지자가 지적했듯이 자칫하면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되어 심리적으로는 미성숙하고 영적으로는 균형을 잃을 만큼 치우칠 수도 있다. 따라서 변화가 더디다고 여겨지는 성도들은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난 성도들은 자신의 경우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고 그것을 일반화해서 적용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된다. 더우기 영적 우월감을 갖거나 변화가 더딘 성도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 더디더라도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가도록 서로 격려하며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말씀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바울 당시의 거울은 오늘의 거울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이 아니라 주로 구리로 만들어서 윤곽을 볼 수 있게 하는 정도의 거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바울의 이 말씀의 의미가 이해가 된다.


오늘 본문에서 두번째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말씀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열두 제자들은 거의 깨닫지 못했다. 누가가 이 본문을 기록하면서 그 이유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되었음이라"(눅 9:45).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깨닫고 믿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깨닫지만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영혼이 거듭나고 영생이 이미 주어진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성숙할 때에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우기 하나님이 깨닫지 못하게 가리실 때가 있고 열어서 보게 하실 때가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위로를 준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답답하고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눈이 열릴 날,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믿고 소망을 품고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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