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으로 무력한 중풍병자 같은 인류
- kleecounseling
- 9월 20일
- 1분 분량
2025년 9월 20일 새벽 묵상하며 쓴 글이다.
마태복음 9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본문은 누운 상태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몇 걸음조차 걸을 수 없을 만큼 무력한(powerless) 중풍병으로 고생했던 한 가버나움 사람을 예수님이 말씀으로 고쳐주시고 그의 죄를 사해주신 내용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풍(中風)이 오면 반신불수자가 될 때가 많다. 그래서 한쪽 손과 한쪽 다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서 매우 부자유스럽게 걷게 된다. 얼굴 근육도 한쪽을 잘 사용할 수 없게 되며 몸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는 부자연스럽게라도 걸을 수 있는 일반적인 중풍병자와는 달리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예수님께 갈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병자였다.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도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앞선 본문에 등장한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역시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귀신들린 자와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 중풍병자는 모태에서부터 죄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태어난 모든 인류를 표상한다. 귀신들린 사람처럼 증상을 표출해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 인류의 실상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어떤 백신도 이 죄의 바이러스를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도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좀더 실감있게 이해한다. 내가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로 날짜를 잡고 건강검진을 했는데 내가 B형 간염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후천적으로 감염되었다고 보기보다는 모태에서부터 간염 바이러스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어머니가 B형 간염 보균자였다. 다른 형제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건강검진하면 여전히 B형 간염 바이러스가 검출된다. 그 바이러스가 나와 함께 지난 세월을 공존해온 것이다. 다행히 전염성은 없지만 언제든지 간염이나 간암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앞으로 B형 간염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이 개발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적어도 예방하는 백신은 있다는 것만해도 다행이다. 그러나 죄 바이러스는 예방 백신도 치료 백신도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유일한 백신이다. 그 피와 연결된 사람만이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할 수 있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무력한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하기 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 이 말이 현장에 있었던 몇몇 서기관들의 마음에 걸림돌이 되었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도 있음을 알리시며 죄를 사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일차적인 목적임을 드러내셨다. 중풍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은 기쁜 일이며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가진 채 병으로부터 나음을 입는 것은 "잠정적"(temporary) 처방책에 지나지 않는다. 곧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령 중풍병이나 암과 같은 치명적인 병에서부터 낫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삶을 사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된 복있는 자이다.
예수님을 둘러쌌던 가버나움 사람들은 놀람의 사건을 목격했고 경외감으로 그들의 마음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 마가는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막 2:12)라는 무리의 반응을 덧붙였다.누가는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눅 5:26)라는 반응으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전체를 살펴볼 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본부가 되었던 가버나움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여러 번 목격하고 예수님의 직강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영향과 혜택을 가장 많이 경험했을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웃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눅 10:13-15). 가버나움 사람들을 반응을 보면 기적을 여러 번 목격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일시적으로는 놀라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를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씨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씨처럼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마 13:20-21)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그것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기적으로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어리석은 자들이다. 믿음은 그렇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생기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 즉 은총이다. 본문에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예수님께 데리고 온 무명의 사람들은 다른 복음서에서 묘사했듯이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침상채로 예수님 앞에 내리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 귀신들린 자와 같고 중풍병자와 같은 나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의 권세(authority)를 높이며 살아가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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