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떡과 주인의 개
- kleecounseling
- 11월 6일
- 1분 분량
2025년 11월 5일 새벽
본문: 마 15:21-28
제목: 자녀의 떡과 주인의 개
예수님은 게네사렛에서 이방 지역이었던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다. 두로와 시돈은 짝으로 나오는 구약의 도시이자 나라 이름이었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하여 해상무역으로 번창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타락해서 소돔과 고모라와 예수님이 비견하셨을 만큼 타락된 도시였다. 두로 왕국의 멸망은 아모스 1장에 예언되었다. 왕국으로서는 멸망했지만 옛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두로와 시돈 지역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방문한 것이다.
예수님은 길을 가고 있고 제자들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 한 가나안 여인이 따라가며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장면이 그려진다.
제자들이 여자가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예수님께 말했다. "She keeps crying out after us.”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녀가 그만 소리지르고 되돌아가라고 말하도록 요청했다.강하게 말하면, "꺼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극이 있으면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단 한 마디의 반응도 하지 않으셨다. 여인의 소리치는 자극과 제자들이 요청하는 자극에도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평소와 달리 반응하셨다. 마치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다. 맹인 바디매오의 경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을 때 군중들은 그가 계속 부르짖는 것을 막았다. 조용히 하라고 방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이키셔서 그를 부르라고 반응하셨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의 경우는 정반대의 반응을 하신 것이다. 귀신에 들려 고생하는 이 여인의 딸을 예수님이 찾아가 고쳐주실 수도 있을텐데 딸의 어머니가 염치를 불구하고 길에서 소리지르면서 고쳐달라고 해도 무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은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대답은 제자들에게 하신 대답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대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대답에서 예수님이 언급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누구인가? 지역적인 또는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하셨는가? 만약 이스라엘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세상의 모든 "잃어버린 양"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적인 또는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이 대답은 이미 예수님이 보이셨던 행적과 모순되는 것처럼 들린다. 이미 예수님은 이방 지역이었던 거라사에 의도적으로 가셔서 귀신들린 한 이방 사람을 고쳐주시치 않았던가? 사마리아 지역을 굳이 통과하시며 사마리아 여인과 그 여인이 살던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이틀을 유하며 교제하지 않으셨던가?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사환의 병을 고쳐주시며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지 않았던가? 마태는 4장에서 마태복음의 첫 수신자가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Galilee of the Gentiles)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지 않았던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영역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참 빛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무엇인가를 교훈하시길 원하셨던 것이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이 여인은 마침내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함의 후손인 가나안 여자로서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녀는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로 오신 다윗의 자손을 믿었다. 그녀의 믿음은 귀신들 들려 고생해왔던 딸을 살리는 믿음이 되었다. 그녀의 믿음은 온 여리고 사람들이 멸망하는 중에도 건짐을 입었던 가나안 여인 기생 라합의 믿음을 기억나게 한다. 라합의 믿음을 통해 그녀의 온 가족과 친척이 건짐을 입었던 것처럼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해 귀신에게 포로가 되었던 딸이 구원을 얻었다. 두로와 시돈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 유일한 여인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하는 이 여인에게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대답을 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대답에서 자녀와 개가 대조를 이룬다. 자녀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를 의미하고 개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대했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이 가나안 여인의 대답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며 지혜가 있었다. 그녀는 딸을 위하여 자신이 개로 불리우는 것을 감내했다. 그녀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말씀하시느냐고 분노하지 않았다. 자기가 들었던 소문과 다르게 반응하는 예수님의 말과 태도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한 채 얼어버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이 맞다고 인정했다. 자신이 개가 맞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탁월하게 대답하였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개들은 그냥 개들이 아니었다. 주인이 있는 개들이었다. 여인은 자신을 개로 인정했다. 이 개는 떠돌아다니는 개가 아니라 주인이 있는 개라고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이 개들, 즉 이방인들의 주인(their master)이 되심을 부각했다. 주인이 있는 개는 주인의 자녀들이 먹고 남은 떡 부스러기를 먹는 혜택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여인은 이 은혜를 예수님께 간구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개" 취급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볼 때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대인들을 "개" 취급했다. 2천년 신약의 역사에서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오해와 핍박과 많은 피해를 입었다. 20세기에 와서는 독일 히틀러 정권에 의해서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개"처럼 끌려가서 개스실에서 살육되는 아픔을 겪기까지 했다.
마침내 이 무명의 가나안 여인은 로마 백부장과 함께 "믿음이 크다"는 예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You have a great faith!)" 예수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올 만큼 놀라운 믿음의 반응을 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악조건 속에서 더 빛났다. 이 여인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어떤 악조건과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지 말고 할 것을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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