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의미
- kleecounseling
- 11월 11일
- 1분 분량
2025년 11월 11일 새벽
본문: 마 16:21-28
제목: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의미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와 같은 제자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기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들 자신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한 자리씩 권세를 얻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체험한 후에 그들은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각자에게 있는 십자가를 지고 결국은 예수님의 뒤를 좇았다.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 아니었던 이전의 삶의 양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왕좌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시는 삶을 의미한다.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님과 연결짓기 되는 삶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자기 부인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your former way of life) 을 따르는 옛 사람(your old self)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the new self)을 입으라"(엡 4:22-24).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에베소서의 본문이 그 의미를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둘째, 본문의 문맥에서는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24절에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언급하신 다음 이어서 25절에서 예수님은 "제 목숨"을 언급하심으로 자기 부인은 죽임당하는 것을 의미함을 말씀해주셨다. 즉 자기 부인은 "예수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도 자기 부인을 중언법으로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에 순종하며 히브리서에 기록된 무명의 성도들은 기쁨으로 고난을 당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지어 해석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오늘 본문 앞에서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어릴 적부터 생긴 전쟁공포증이 30대 중반기까지 남아 있었던 핵심 이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했지만 마음의 심층부에서는 전쟁이 나서 죽는 것을 두려워했던 마음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의식 세계에 그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어서 전쟁과 관련된 악몽을 자주 꾸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20대 초반에 낙동강에서 익사 직전에 구조되어 생명을 얻은 후에도 전쟁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어떤 계기가 있어서 전쟁과 관련된 악몽도 거의 꾸지 않고 전쟁공포증도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한국 전쟁과 같은 전쟁의 위협이 없는 미국 땅에서 사는 것이 감사하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총기의 위협이 있어서 죽음의 위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내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싶다. "주님, 저는 이미 주님의 은혜로 충분히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왕이면 헛되이 죽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죽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이어서 언급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26절). 이 표현은 잠언에서 사용된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 방식과 비슷하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라"(잠 17:1)와 같은 잠언에서 이같은 비교법이 사용되었다. 선택해야 할 때 더 유익한 것, 더 나은 것을 택하는 것이 지혜이다. 천국은 값비싼 진주를 찾는 진주 장사와 같다는 천국 비유에서 그 장사는 값비싼 진주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그 진주를 만났을 때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산다.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보다 그 진주가 훨씬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잃어야 한다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 훨씬 가치있고 유익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 천하를 얻어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살아 있어야 천하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데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그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온 천하를 얻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데 "걸림돌"(a stumbling block)이 된다면 온 천하를 얻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땅에서만 잠정적으로 유익한 "제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베드로는 실제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제 목숨"을 부인하는 대신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는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자기 목숨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데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던 자였다. 영적으로 파산한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시고 회복시키시고 기독교회에 귀한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주셨다. 전적으로 그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식인도 아니었던 그가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되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한 "밤하늘에 찬연하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자기부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자기부인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말씀대로 믿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단지 인간적인 생각과 도리로 예수님을 안심시키며 보호하려고 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호언장담했던 그의 모습과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all of you)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낳기를 기도하엿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고 말씀해주셨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어 한 말은 성령의 감동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인본적인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조금 전에는 "바요나 시몬이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는 칭찬의 말을 들었던 그가 곧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꾸짖었는데 오히려 그가 예수님께 꾸짖음을 받는 수치를 겪어야 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아직은 불안정한 믿음을 가진 자였음을 본문은 보여준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는 사건을 체험하기 전에 모든 제자들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해서 잘 드러낸 사도 요한의 경우도 베드로와 마찬가지 수준이었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1-2절에서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이시며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삼년의 공생애를 목격한 자로서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였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된 이시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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