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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와 가치절하의 위험성

2025년 11월 10일 새벽 

본문: 마 16:13-20

제목: 이상화와 가치절하의 위험성 


오늘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기록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본문이다. 이 사건 다음에 바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계시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체 분량을 고려할 때 마태는 이 사건을 전체 28장 중에서 16장에서 다루며, 마가는 전체 16장 중에서 8장에서 다루며, 누가는 전체 24장 중에서 9장에서 다루었다. 마가의 경우 거의 중반부에 배치했다면 마태는 후반부 앞 부분에 누가는 전반부 뒷 부분에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마태는 마가보다 좀더 상세하게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서 이런 부분을 두고서도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마태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한다. 후에 기록된 경우 먼저 있던 내용을 빼는 경우보다는 추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예수님이 시몬이라는 그의 본명 대신 새 이름인 "베드로"(반석)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이 반석"(this rock)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내용을 추가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천국 열쇠를 "너에게"(또는 너희에게?) 줄 것인데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말씀하신 내용도 더 기록하였다. 20절에서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지어 해석한다면 "너"(you) 대신에 "너희"(you)로 해석하면 오히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초대 교회 공동체의 기반이 되었던 열두 제자들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자연스러운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문이 있고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 위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자파의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과도 일치하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제도가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베드로가 교회의 기반을 놓은 첫 교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흐름과 정신으로 볼 때 잘못된 해석에 기반한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인 해석에 따른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이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것을 배격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대로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가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이루신 것을 믿은 자들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된다. 따라서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 외에는 어떤 다른 중보자(mediator)가 있을 수 없다. 신부(神父)라고 부르는 "priest"는 원래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신부가 마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했던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신약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비성경적인 사상이다. 고해성사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신부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신부들의 최고봉에 있는 교황이 마치 대제사장인 것처럼 행사하는 것도 비성경적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모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비교하면서 옛 언약의 한계를 잘 드러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단번에"(once for all)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동물제사를 드리지 않게 되었는 것이다. 동물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들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존재해서도 안 된다. 마틴 루터도 한때 신부의 신분으로 삶을 살았지만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많은 부분에서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만인제사장설"을 부르짖은 것이다. 신약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왕같은 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이다(벧전 2:9 참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과 연결짓기가 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장적인 정신과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여전히 예수님과 연결짓기가 되지 않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과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약의 목사들도 제사장이 아니다. 예배당을 여전히 "성전"이라고 부르는 교인들이 있는데 각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지만 눈에 보이는 구약의 성전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잠정적 대상"(temporary object) 역할을 하고 사라졌다는 점에서 교회당과 성전을 혼동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교단의 질서상 총회장도 선출하지만 총회장이 교황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대제사장과 같은 존재도 아니다.


본문에서 천국 열쇠를 준다는 것은 베드로에게만 특권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베드로도 연약한 한 인간이었다. 성령 하나님이 그의 입술로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의 신앙고백은 "혈육(血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베드로의 통찰이나 지혜로 그와 같은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에게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미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추론해볼 수 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9-20절).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놀라운 모습을 목격했을 때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을 때 사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말을 했다고 마가는 기록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He did not know what to say, they were so frightened) (막 9:6).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도 스스로 놀랐을 수 있는 신앙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예언하자 "주여 그리 마옴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꾸짖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던 연약한 자였다. 예수님은 심지어 그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직면하셔야 할 연약한 제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맹세했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연약한 한 인간이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이상화했을 때 멋진 신앙고백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목사도 마찬가지이고 신부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을 "이상화"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이다. 경계성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의 특징의 하나가 "이상화 vs. 가치절하"라는 양극단적인 사고와 무드와 인간관계이다.


한국교회는 목사를 존경하며 존중하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다. 미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들은 목사를 존경하며 존중하는 면에서 약한 면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존경하며 존중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특히 담임목사의 경우 지나칠 정도의 카리스마를 행사하거나 이상화(idealization) 될 정도로 대접받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부제도나 교황제도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목사도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인제사장설"의 원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일반 교인도 제사장이기 때문에 목사는 필요없고 누구나 설교를 할 수 있고 축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성이라는 점에서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이 신약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세우신 "가르치는 장로"제도의 성경적인 질서와 바운더리를 허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런 생각은 교회를 약화시키는 사탄이 또다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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