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이적과 칠병이어 이적
- kleecounseling
- 11월 8일
- 1분 분량
2025년 11월 7일 새벽
본문: 마 15장 32-39절
제목: 오병이어 이적과 칠병이어 이적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다른 무리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 빈들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남자만 사천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사흘간 빈들에게 지냈을 때 첫째날은 음식을 먹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머지 이틀 정도는 자연스럽게 금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때에는 도중에 기진해서 쓰러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그들이 적어도 이틀 이상 먹지 못한 채 지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아이들과 여자들도 많이 있었을텐데 사흘간(적어도 이틀간) 음식을 먹지 않고 산에서(빈들에서) 자원해서 지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이 무리들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지형 특성상 밤에는 기온이 상당히 내려가는 빈들에서 그들이 기꺼이 함께 노숙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이들은 사십일을 금식하셨던 예수님과 비교할 때 짧은 기간이었지만 빈들에서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천국 잔치에 참여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배고픔의 고통도 견딜 수 있었으리라.
예수님은 사흘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각종 병을 고쳐주시고 말씀도 가르쳐주셨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명이라도 길에서 기진해서 쓰러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대하여 "컴패션(compassion)"을 가지셨고 그들의 입장을 백퍼센트 공감하셨다.
예수님의 기적은 공감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신다. 욥을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셨듯이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이신 공감적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욥 38:41;시 147:9 참조).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반응하시는 분이시라면 당연히 자기가 택한 "양들"의 상황을 알고 응답하신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양우리에 남겨두고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공감적인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사흘이나 굶은 양들에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셨다(시 23:2 참조). 무리들을 땅에(풀밭에) "앉게" 하셨다. 유대인들에게 앉았다는 것은 식사할 때 비스듬하게 몸을 침상이나 바닥에 기대는 모습을 의미한다. 남자들만 사천명이나 되는 큰 무리들이 빈들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은 초장에 누워있는 큰 양떼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태는 바로 앞 장인 14장 13절부터 21절까지 아홉 절이나 배당하며 오천명을 오병이어 이적으로 먹이셨던 사건을 기록했는데 오늘 15장 본문에서 거의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는 칠병이어 이적 사건을 굳이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두 사건의 의미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가도 이 두 사건을 다 기록했다. 두 사건을 비교해본다면 첫째, 14장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리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이 반응한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사흘이나 굶은 그들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둘째, 14장에서는 제자들이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청한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대답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셋째, 14장에서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 뿐이니이다"라고 반응한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먼저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넷째, 14장에서는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었을 때 열 두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실 12와 7은 유대인들에게 완전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것도 충분했다는 의미이다.
질문이 생긴다. 큰 차이가 없는 두 사건을 마태와 마가는 왜 굳이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한번 일어난 사건인데 기록자가 착각해서 반복해서 기록하면서 숫자도 착각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어리석은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두번이나 행하신 이 기적을 마태와 마가가 상세하기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주실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남자만 사천명이나 되며 사흘이나 굶은 큰 무리가 광야에서(빈들에서, in remote place)먹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굶주린 모습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류의 모습과 비슷하다. 사흘이나 굶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 먹고도 남을 정도로 먹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이나 굶어 거의 기진한 그들을 위하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나누어주심"으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 되실 것을 예표하는 기적을 다시 베푸셨던 것이다.
제자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사흘이나 함께 한 무리를 굶겨서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 중 그 누구도 14장에서 일어났던 오병이어 사건과 연결지어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슷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뇌는 전혀 연결짓기 하지 못했다. 마치 해리(dissociation) 경험을 한 것처럼, 흔히 하는 말로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처럼 행동했다. "예수님, 지난 번에 행하셨던 이적을 이번에도 행하시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한 제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광야에서 새로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기적적인 홍해 사건과 마라의 사건과 같은 이적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행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닮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적인 삶의 에피소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연결지어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모습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교훈하며 도전하며 동시에 위로를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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