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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옷자락

2025년 11월 3일 

본문: 마 14:34-36

제목: 예수님의 옷자락 


밤새도록 풍랑과 씨름하며 삶과 죽음의 위기를 오갔던 제자들은 한 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녘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 위를 걸어서 찾아오심으로써 그들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탈진한 제자들은 노를 저어 동이 틀 무렵 게네사렛 동네에 도착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예수님이 오셨음을 알고는 모든 주변 지역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알렸다. 특히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님께 치유받도록 초청한 것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든 병을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 13:57)라는 말씀을 들었던 고향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적과 능력을 경험할 수 없었다. 마태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 13:58). 그러나 게네사렛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은 매우 대조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천국 말씀을 듣기도 전에 이미 들은 소문만으로 믿음으로 반응했다. 자기 동네 병든 사람들만 고침을 받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도 놀랍다. 주변 동네 병든 사람들까지 고침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공감력이 있었다. 그들은 주변 동네를 두루 다니며 예수님이 게네사렛에 도착하셨으니까 어떤 병에 걸린 자라도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 전도를 한 것이다. 


오늘 본문 다음이 곧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먼 거리에 위치한 예루살렘에서 파송을 받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율법의 세부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빌미로 예수님에게 도전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게네사렛 동네 사람들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엘리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를 기반으로 어업에 종사하거나 변두리 지방에 사는 소박한 평민들이었고 지식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만들어놓은 세부 율법 규정을 지키며 살아야 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었다. 


게네사렛 동네 사람들은 그가 모든 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믿었다. 본문에 기록된 문장의 구조를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병든 자들이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은 병든 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청한 사람들은 병든 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던 건강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NIV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People brought all their sick to him, and begged him to let the sick just touch the edge of his cloak, and all who touched it were healed”. 게네사렛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놀라울 정도이다. 그들의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한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지붕을 뜯고 예수님이 있는 자리에 달아서 내렸던 사람들의 믿음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의 믿음은 작은 겨자씨와 같은 소박하며 작은 믿음이었다. 그러나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많은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주변 동네의 모든 병든 자들이 치유와 안식을 누리게 하는데 쓰임을 받았다. 그들은 천국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듣고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병에 걸린 자들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다수가 이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주변 동네에 두루 다니며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여러 동네에 두루 다녔던 것처럼 행동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게네사렛 동네 사람들은 병든 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건강하면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종합병원에 가보면 세상에 참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또 아픈 사람들이 있어도 자신이 아픈 것처럼 동일시하며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잘 생기지 않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일반적인 심리이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변 동네에 있는 병든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전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모든 병자들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그렇게 간청했다. 본문은 기록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들이 그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셨다.  마태는 마지막 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고향 나사렛에서는 몇몇 병자만 안수하여 고치시는 이적만 행하셨던 것과 대조적으로 게네사렛에서는 놀라운 이적이 벌어졌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병자들이 만져도 치유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이적은 마태복음 9장에 기록된 십이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겪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 몰래 그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병고침을 받은 사건과 연결된다. 예수님의 "허락도 없이"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한 여인이 그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녀는 즉시 나음을 입는 이적을 경험했다. 많은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많은 돈만 허비하고 고생하며 십이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수치와 좌절 속에 살았던 한 여인이 불치병으로부터 깨끗하게 즉시 나음을 입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 게네사렛에 모여온 수많은 병자들은 예수님의 "허락하에" 옷자락을 만졌고 모두 치유를 받는 이적을 체험했다. 일부만 아니라 옷자락을 만진 모든 병자들은 고침을 받았다. 비슷한 이적이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회심했던 바울 사도의 사역에서도 나타났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2) 바울의 개인적인 경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운 지 팔년이나 된 사람에게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고 명했을 때 곧 자리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이적이 일어났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했던 이적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였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아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서 이미 시체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나사로의 시신이 다시 살아났던 것과 같은 부활의 이적이 베드로의 사역에 일어났던 것이다.


기독교에서 기독론(Doctrine of Christ, Christology)이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셨고 행하시는 가를 다루는 교리이다. 인간 예수만 보면 믿기 어렵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다. 세상의 지혜를 중요시한 헬라 철학을 따르는 헬라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걸림돌이었다.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한 헬라 철학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행적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했던 유대인들, 특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라는 사실이 걸림돌이 되었다. 율법의 말씀대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는 율법의 말씀을 따르면 예수님은 저주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저주 받은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다. 이사야는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잘 예언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그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전가(transfer)됨으로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우리의 죄가 그에게 전가됨으로 그는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십자가 사건의 역동성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게네세렛 동네에 모여든 모든 병자들의 병을 그에게 전가하시고 흡수하심으로써 그의 창조의 능력으로 그들의 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모든 병자들의 병을 다 자신이 짊어지실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 성령을 통하여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 사람의 죄가 아무리 많고 크다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은 그 죄를 흰 눈보다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한 사람의 죄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다 합쳐도 깨끗하게 도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도 "단번에"(once for all) 말이다. 자신이 병자임을 인정하고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성령께서 그 죄사함의 능력을 적용하신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버나움, 벳세다, 고라신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최후 심판 날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님은 소돔과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그들보다 심판을 견디기가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세계에 편만하게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치유함과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뻔 한 사람들이다.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복음의 소리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경청하며 순종할 때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옥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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