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좇은 두 맹인 거지
- kleecounseling
- 2025년 12월 2일
- 1분 분량
2025년 12월 1일
본문: 마 20:29-34
제목: 예수님을 좇은 두 맹인 거지
오늘 본문은 내가 총신대 신학대학원 다닐 때 이 본문을 구조주의적인 해석방법을 통해 해석하는 짧은 글을 써서 "총신원보"라는 학교 월간 신문에 실었던 기억이 있는 본문이다. 신대원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신약학자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갖고 주로 신약학과 관련해서 공부했고 "고린도전서 7장에 나타난 바울의 독신관"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해석학적으로 접근하고 적용점을 찾는 식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 당시 나는 구조주의의 틀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은 대부분 그 내용을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구조주의적 해석의 핵심적인 주장은 텍스트를 쓴 원래의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의미가 텍스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텍스트가 원저자의 손을 떠나면 더 이상 그 텍스트는 원저자의 텍스트가 아니라 읽는 사람의 텍스트가 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 접근이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저자의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의미가 텍스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구조주의적 해석학의 접근은 주로 문장의 구조와 단어의 배치와 등장인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이라고 기억한다. 신약학자가 되겠다는 꿈은 미국 유학을 시작하기 바로 전에 목회상담학을 전공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어쩌면 약 40년의 세월이 지나 이번에 마태복음을 묵상하는 글을 쓰면서 그때 내가 가졌던 꿈이 일부 성취가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본문은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니라"로 시작해서 "그들이(두 맹인이) 예수를 따르니라"로 끝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따르다"는 동사는 같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큰 무리가 따른 것은 말 그대로 그냥 따라간다는 뜻이라면 두 맹인이 따랐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른 것은 SNS 상에서 어떤 사람의 팔로워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유명인들의 경우에 팔로워는 수백만명 또는 수천만명이 되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을 맺거나 헌신하는 관계의 팔로워는 아니다. "좋아요"를 클릭해주는 정도의 팔로워들이 대다수이다. 두 맹인들의 여생에 대해서는 공관복음 기자들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를 따랐다"는 문장 하나로 그들이 육신의 눈이 열린 것을 기뻐하며 각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있다. 그들은 열두 제자들처럼 천국에서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는 욕망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생 씨름해온 눈먼 상태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제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은 육신의 눈만 열렸을 뿐 아니라 영의 눈이 열렸던 자들이었다.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본문을 본다면 큰 무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서서" 걷고 있으며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에 두 맹인은 길가에 계속 "앉아" 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 두 집단은 대조를 이룬다. 한쪽은 동적(動的)이지만 다른 한쪽은 정적(靜的)이다. 예수님이 멈춰 서시면서 무리도 정적이 된다. 마침내 두 맹인도 동적인 무리의 일부로서 전체가 예루살렘을 향해 동적이 된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서 동적일 때 동적이며 정적일 때 정적일 수 있는 분별력이 있었음을 오늘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매우 바쁜 사역 중에서도 홀로 하나님과 독대하며 밤새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항상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항상 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정과 동이 타이밍에 맞게, 균형있게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삶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There is a time for everything, and a season for every activity under the heavens) (전 3:1)라는 말씀은 이 사실을 잘 표현했다.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기도의 소리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Lord)라고 불렀고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이라고 불렀다. 부자 청년처럼 "랍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것은 "무리"로 표현된 다수와 집단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거지이자 맹인인 이 두 사람을 무시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이 둘에게 긍휼심과 자비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예수님께만 향해 있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라고 대답하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셨음에서 이 무리는 정죄받을 수 있는 무리였다. 큰 무리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심정을 몰랐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라고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다. 큰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두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가 되며 제자가 되는 길에 도우미가 되기는 커녕 방해꾼이 되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두 맹인을 실족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분이셨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자신을 따르는 큰 무리보다는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고 있는 두 맹인 거지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곧 닥쳐올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정신을 집중하느라 두 맹인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시거나 듣고도 무시하지 않으셨다.
무리는 두 맹인 거지들에게 잠잠하고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꾸짖었다는 말은 두 맹인들의 소리치는 행동을 판단하며 정죄했다는 의미이다. 아쉽게도 무리들 중에 (제자들을 포함하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지르는 두 맹인의 심정을 공감하는 이들이 없었다. 마태복음 14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게네사렛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자신들의 동네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던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군중이었다. 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지 않았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도전과 교훈을 준다. 몸은 예배 시간에 와 있지만 마음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형식적으로 드릴 때가 적지 않다. 예배 참석은 빠지지 않지만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는 게으른 것이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맹인들이 예수님의 진로를 방해하는 방해꾼처럼 여겨 조용히 하라고 꾸짖은 것이다. 그들은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할 뻔 했다. 그들 모두는 연자 맷돌이 목에 걸려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을 뻔한 자들이 되었다. 이들의 모습은 일상 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하는 우리의 행동에 좀더 신경을 쓰고 자각하며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큰 무리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고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반면교사들이다.
두 맹인은 군중의 꾸짖음에 주눅들지 않았다. 그들은 무리의 꾸짖음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욱 소리를 질렀다." 자칫 폭력적일 수도 있는 다수의 횡포 앞에서 그들은 주눅들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일까? 시각장애인으로서 총신대 총장을 지냈던 이재서 교수님과 함께 부총장으로 일할 때 "자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할말 안할 말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농담삼아 말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우리가 두려운 것은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더욱 소리질러 예수님을 불렀던 것은 무리가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를 지른 행동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큰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누구에겐가 물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에요?"라고 물었으리라. 누군가 그들에게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해준 것이다. 그들은 볼 수 없었지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 사실 보는 것보다 듣는 귀가 더 중요하다. 보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은 반면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두 맹인 거지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 즉 구약에서 예언해온 메시야이라는 소식을 들었고 예수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은 "주"라고 부르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는 말씀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부른 것이다.
놀랍게도 적어도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맹인은 예수님의 치유 기사로는 마지막으로 기록되는 치유의 수혜자가 되는 은혜를 입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예수님과 연결되는 은총을 입었고 또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
다시 구조주의적인 해석방법으로 돌아온다면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셨다. 따라서 그의 뒤를 따르던 큰 무리의 발걸음도 멈추어졌을 것이다. 마가는 두 맹인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마가는 한 명의 맹인만 언급했다. 그는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였다. "바(bar)"는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이다. 그리고 그는 맹인 "거지"였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마가는 예수님이 멈춰 서시고 "그를 부르라"고 무리에게 말하셨고 무리가 바디매오를 부르며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반응한 사실을 기록했다(막 10:49). 자칫 실족하게 할 뻔 했던 무리가 두 맹인의 우군(右軍)이 된 것이다. "안심하고 일어나라"(Cheer up! On your feet!)라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된 것이다. 마가는 이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jumped to his feet) 예수께 나아오거늘"라고 기록했다(막 10:50). 이 행동에서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반응했음을 알 수 있다. 혹시라도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서 자신의 중요한 재산이었던 겉옷을 챙기느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갔다. 겉옷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재산이었다.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막아주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옷을 전당잡히는 경우에도 해가 질 때에는 겉옷을 돌려주라고 하는 율법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디매오에게 그의 겉옷은 더 이상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걸인의 삶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주실 분임을 확실히 믿었다. 그의 행동이 그의 믿음을 잘 표현했다. 그는 히브리서 말씀처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다 벗어버리고 그의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한 신앙인으로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으로 교훈하고 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 애착하는 것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인생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지혜자가 되기를 그의 행동으로 교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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