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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잔 vs. 고난의 잔

2025년 11월 30일 

본문: 마 20:20-28

제목: 영광의 잔 vs. 고난의 잔


세베대의 아내이자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았다. 제자들의 부모 이야기는 복음서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베드로의 경우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이 그녀를 고쳐주셨고 그녀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수종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본문에 나오는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 그녀가 매우 적극적인 어머니임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장성한 두 아들들의 좋은 입지를 선처해달라고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이해할 만하다. 마치 초등학교 때 "치맛바람"을 날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녀가 찾아온 것도 흥미롭다. 사실 요한과 야고보는 직접 예수님께 부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그녀는 두 아들들을 "데리고" 왔다. 아마도 그녀의 양손으로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왔을 수도 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헬리콥터형" 어머니였다고 볼 수 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아버지 세베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2). 오늘 본문에서 세베대는 같이 오지 않은 것이 흥미롭다. 그들은 아버지와는 구별짓기를 했지만 어머니와는 구별짓기를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청했다. 예수님의 어머니 나이 또래였을텐데 자신을 낮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동과 그 속마음은 달랐다. 행동으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자신의 아들들이 최고의 위치에 앉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자녀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 모든 세상 부모의 공통된 심정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아들들이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그들을 통해 자신도 함께 높아지는 것 같은 대리적 욕구도 있었으리라. 그녀의 행동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취했던 행동과 닮았다. 와서 무릎을 꿇고 청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이 어머니는 아들들의 권력을 얻는데 관심이 있었다는데 있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속마음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입으로 나오는 말을 듣기를 원하셔서 질문하셨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이어지는 본문에 등장하는 시각장애인 두명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을 때 그들에게 한 질문과 거의 같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2절). 기도라는 관점에서 그녀의 행동을 이해한다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기도는 자신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구한 기도였다. 그러나 두 시각장애인의 기도는 자기들이 평생 씨름해온 핵심적인 이슈에 대해서 구하는 기도였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부합되는 기도였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병든 자와 약한 자들을 치유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는 바로 응답받았다. 마태는 그들의 눈이 열렸을 때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34절)라고 기록함으로써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의 무리에 포함되었음을 시사하였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나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천국이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나라임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보이는 천국을 기대했던 것이다.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였고 나머지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요청은 위험한 요청이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보좌 오른쪽과 왼쪽에 앉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좌우편에 달렸던 강도의 자리에 두 아들들이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과 야고보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가 되어야 부활할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으로 간주하셨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하신 것으로 간주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우리와 동일시(identification) 하시고 우리와 연결짓기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그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의 신비를 잘 표현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을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십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롬 6:3-9).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대답하셨다. 이 질문에 대해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할 수 있나이다"(We can)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 잔이 왕의 술잔인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아무도 대신하거나 함께 할 수 없는 잔이었다. 그 잔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잔이며 모든 인류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예수님이 이 진노의 잔을 마시려고 땀을 피같이 흘리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모든 제자들은 졸며 잠을 잤다. 마침내 위기가 왔을 때 목숨을 부지하려고 다 도망갔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며 많은 크리스천들의 모습이다. 영광의 잔을 마시기를 원하면서도 고난의 잔은 마시는 것을 싫어하며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기까지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이 닥쳐오며 핍박을 받으며 광야생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고난을 당하면 무슨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는 예수님이 마신 잔과는 다르지만 각자가 마셔야 하는 "쓴 잔"이 있다. 이 잔을 마셔야 하나님이 보이고 성경의 말씀이 믿어지며 내면세계에 변화가 일어나며 영원한 나라에 대한 진정한 소망을 품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난의 잔이 성도들에게 주는 유익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we also glory in our sufferings)  이는 환난은 인내(perseverance)를, 인내는 연단(character)을, 연단은 소망(hope)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we know that)" (롬 5:3-4). 


예수님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You will indeed drink from my cup)"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의 앞날을 알고 계셨다. 지금은 그들이 구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순교를 당할 것을 알고 계셨다. 오늘 본문 이후에 얼마 가지 않아 야고보는 헤롯에 의하여 옥에 갇혔다가 헤롯 왕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 12:1-2).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세례요한 역시 헤롯의 칼에 목베임을 받아 순교했다. 사도 요한은 열두 제자들 중에서는 제일 오래 살았지만 그도 신앙 때문에 밧모섬에 귀양을 갔고 최후에는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다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고 그를 따랐던 제자들의 순교의 피로 자라났다. 한국교회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복음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젊은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서 피를 흘렸고 죽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와 6.25 사변을 겪으면서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개인적으로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기독교신앙을 선택했던 많은 신앙선배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잔을 기꺼이 마심으로써 오늘의 한국교회가 될 수 있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지금의 한국교회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은 나를 포함해서 각자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영광의 잔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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