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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일치(言行一致)

2025년 12월 13일 

본문: 마 23:1-12

제목: 언행일치(言行一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리"에 민감한 자들이었음을 지적하시면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들을 닮지 않도록 경고하셨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고 설교했다. 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했고 원했다. 소위 상석(上席)을 좋아했다. 자신들의 내부에서도 출신배경이나 임용순으로 순위를 정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리순서가 있었을 것이다. 직장에서도 입사순으로 선배 후배가 정해지고 때로는 직위에 따라 선임과 후임이 정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목사 세계에도 이런 보이지 않는 순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회의 경우에도 후배가 선배를 제치고 노회장이 되면 선배가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그럴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는 계급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교수사회도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와 같은 시스템이 되어 있다. 미국 직장에서도 보스의 힘은 크다. 타락한 세상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권위와 힘의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장로교회 시스템은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서리집사, 권찰 등의 직분이 어느 정도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은 교회가 조직체로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하며 신앙생활에서 동기를 부여해주며 책임감을 갖게 해주는 순기능이 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내면의 모습이 이런 구조의 동기가 된다면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을 것이다. 이들의 동기는 사람로부터 관심과 주목과 인정을 받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라고 그들의 숨은 동기를 드러내셨다. 그들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의식했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척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지만 그 살기(殺氣)를 백성들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백성들의 시선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정신의학에서 사용하는 DMS-5의 진단기준으로 본다면 여러 성격장애의 증상을 갖고 있었다. 상석(上席)을 좋아하고 모세의 자리에서 가르치기를 좋아했던 점에서 그들은 자기애성 성격장애와 연극성 성격장애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자기 웅대성과 특혜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공감을 할 줄 모르는 모습에서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그들은 사람들부터 주목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연극성 성격장애의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이 지적했듯이 그들은 "외식(外飾)하는 자들"(hypocrites) 이었다.  연극성(histrionic)이라는 영어단어는 라틴어 "histrio"에서 온 단어인데 배우라는 뜻이다. 실제 모습이 아닌 배우처럼 연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우나 연예인들은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과 인기를 끌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이미 공생애 사역 초기에 산상보훈을 통해 구제할 때, 기도할 때,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마 6장 참조). 구제할 때 사람들이 보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심지어 자기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기도할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터에서 기도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금식할 때에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슬픈 기색을 내지 말고 금식하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 고난을 앞둔 시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라고 그들의 내면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을 닮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이 부분을 쓰면서 부끄러운 내 모습이 기억났다. 총신대 신대원의 전임대우 교수로 임용되어 1994년 가을학기 첫 학기를 마치고 1995년 2월에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겨울방학 동안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갔다가 졸업식 날짜에 맞추어 귀국했는데 박사학위 가운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서 총신대 학부에 교수로 있었던 모교수님의 학위복을 빌려서 입고 참석했다. 남침례신학교 동문이었기 때문에 내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가 없었다. 충현교회당에서 졸업식이 있었는데 졸업식장에 들어가면서 후드가 달린 박사학위가운을 입고 팔각형 학위모를 쓰고 졸업식장에 입장하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난다. 이 경험은 나의 낮은 자존감에 잠시 목을 축이는 정도로 상쇄하는 경험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나의 핵심 이슈를 치료하는 경험은 될 수 없었다. 학위도 학위복도 약발이 얼마 가지 못했다. 오히려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잔치에서 상석에 앉거나 설교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쭐대며 자랑스러워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진정한 자기를 찾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못하면 그들이 맹인이 되어 맹인들을 인도하는 거짓교사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오늘 본문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특히 설교를 맡은 목사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NIV는 "they do not practice what they preach"라고 번역했다. 그냥 말이 아니라 가르치며 설교하는 말이다.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주 새로운 설교를 준비해서 한다는 것은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 아무튼 설교자 자신도 부족한 신앙인이지만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 본문대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자신이 부족한 면이 있다고 어떤 본문은 피하고 설교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이 될 것이다. 설교자라고 해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설교자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본문과 씨름하고 설교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칫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교인들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는 설교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엇던 강박성 성격장애적인 내면의 모습에서 나오는 완벽주의 이슈로 설교하면 투사(projection)의 방어기제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 본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설교하면 투사하는 설교가 될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더 민감하게, 더 강조하며 열을 내며 설교한다면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는 방어기제가 작동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8-10절)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은 랍비라고 칭함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아도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은 참 아버지라고 칭함을 받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한국인들은 "선생님, 목사님, 교수님, 박사님, 사모님, 장로님, 권사님, 사장님, 총장님"등 직함으로 불리워지기를 좋아한다. 직함을 불러주지 않으면 무시받는다고 생각한다. 유교적인 문화적 배경도 있다. 이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내면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신경쓰고 두려워하지 않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외식하는 자로 변질되고 있지 않은지 특히 목회자들과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더욱 경성해야 한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제자들이 변질되지 않도록 경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절). 하나님은 누구도 모세의 자리에 앉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죽었다가 은혜로 살아난 자로서 자신을 낮추며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며 사용하신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고 오늘도 나에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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