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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자 vs. 모르는 자 

2025년 11월 13일 새벽 

본문: 마 17:9-13

제목: 아는 자 vs.  모르는 자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 홀연히 나타난 두 사람이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라는 것을 알았을까? 적어도 천년 전 또는 칠팔백년 전의 인물인 두 사람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오늘날처럼 사진이나 그림이 있어서 대충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알아차렸을텐데 말이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 12절에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they did not recognize) 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다.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말라기 선지자가 구약의 마지막 절에서 예언한 것을 그들은 읽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 제자들도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이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엘리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닐까라고 질문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르며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완악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부인했다. 실상은 그들이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길가와 같은 마음의 상태였기 때문에 전혀 수용력이 없었다. 바울은 이들과 같은 자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이 세상의 신이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고 잘 지적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has blinded the minds of unbelievers)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세례요한은 자신이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그의 외모를 통해서 암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런 복장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다(마 1:6 참조). 아무튼 그의 삶의 모습은 외롭게 활동했고 외양이 털이 많고 가죽 허리띠를 묶고 다닌 엘리야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이 죽은 뒤 왕이 된 아하시아가 다락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 그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물으라고 신하들을 보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열하 1:6)는 말을 전하게 했다. 엘리야의 말을 듣고 되돌아간 신하들이 엘리야의 말을 전했을 때 왕은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고 물었다. 이때 신하들이 대답한 엘리야의 외양이 세례요한의 외양과 닮은 것이었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열하 1:8). 이 대답을 들은 아하시아는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라고 대답하면서 신하들이 묘사한 그의 독특한 외양을 통해 그가 엘리야인 줄 알아차렸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아하시아도 그의 외양을 묘사하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금방 그가 엘리야인 줄 알아차렸는데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열왕기하 1장 8절을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텐데도 그들은 요한의 외양을 보고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참으로 이사야의 예언처럼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요한의 정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했을 때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대답했고 "네가 엘리야냐"라고 했을 때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고 "네가 그 선지자(the Prophet)냐"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라고 대답했다 (요 1:19-21 참조). 이 대답에서 세례요한이 스스로 자신이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했던 엘리야로 온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는 말씀처럼 요한의 가르침을 믿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조사하기 위하여 온 그들에게 굳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자신은 엘리야, 즉 그 선지자가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제자들조차 세례요한이 말라기 선지자가 오리라고 예언했던 엘리야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랐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해줄 메시야로 기대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어린양으로 오신 메시야인 줄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가까이 생활했던 제자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이사야 53장과 같이 메시야를 예언하는 말씀을 읽었지만 고난당하는 어린 양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이 사실을 잘 지적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did not understand it)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5-10). 말라기 선지자가 구약의 마지막 절에서 예언했던 엘리야가 세례요한임을 깨달아야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달을 수 있는데 첫 단추를 잘못 채우니까 나머지 단추도 다 안 맞게 채우는 격과 같이 된 것이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은 이 안타까운 현실을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서 잘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5:39-47). 그들이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율법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가 기록한 율법이 결국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제자들은 전혀 본 적이 없는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에 나타났을 때 그들을 "알아보았다"(recognized).  아마도 예수님과 대화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알아차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의 이름을 직접 부르셨을 수도 있다. 아무튼 세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메시야가 오기 전에 임할 엘리야가 세례요한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시사한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 17:13). 그런데 변화산에서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 보고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말과 변화산에 나타난 엘리야의 사건이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 제자 모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마태는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라고 기록했다. 보통은 베드로나 한 제자가 예수님게 질문하거나 답변하는데 여기에서는 세 제자 모두 함께 질문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그들에게 자신이 죽은 자들 중에서 부활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변화산에서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자 그들은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세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이 사건을 가슴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마가는 세 제자들이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서로 논의할 정도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도 드러낸다.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막 9:10). 그들은 죽은 모세가 살아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부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인류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본문 앞 절에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실제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가 있다. 예언된 엘리야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기적적인 방식으로 태어난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30대초반의 나이에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가 표현한대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 그대로였다. 변화산에 나타났던 구약의 위대한 신앙인물인 모세와 엘리야도 변화산에서 제자들 앞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오직 예수 외에는" 부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바울도 놀라울 정도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지만 바울도 배경(background)으로 사라져야 한다. 바울을 우상시하거나 이상화 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그의 육체에 고통을 주는 가시, 곧 사탄의 사자(a messenger of Satan)를 뽑아달라고 세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응답하시며 그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고통의 의미를 잘 깨달아 고백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그도 자만할 수 있는 인간적인 요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한 인간이었다. "오직 예수만" 유일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영광을 받으실 분이심을 이 아침도 고백한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말씀대로 믿고 알고 섬기며 순종하는 무리가 있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여전히 알지 못하고 믿지 않으며 예배하지도 않고 순종하지 않는 무리로 나뉘어진다. 심지어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지만 실상은 무신론자인 무리들도 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한 기도는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 해야 할 기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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