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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 (Stumbling)

2025년 11월 19일 새벽 

본문: 마 18:5-10

제목: 실족(Stumbling)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는 1-4절과 연결해서 해석할 수도 있고 6-10절과 연결해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어떤 점에서는 1-4절과 6-10절을 연결짓는 역할을 한다. 5절은 "또"(And)라는 접속사로 시작함으로써 앞 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 본문에는 "실족(失足)"이라는 단어가 적어도 네 번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이 실족했던 본문이기도 하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구속적인 상황에 빠져 신앙생활에서 심각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8절에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순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한 이들이 기독교 역사에서 있었다고 한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는 7절을 예수님의 이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말씀에 제대로 순종한다면 이 세상은 맹인들과 두 다리가 다 없는 핸디캡들로 가득 찰 것이다. 태어나서 손이나 발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라는 말씀은 오랫동안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자살을 방조하는 말씀처럼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헬라어 동사로는 "달려서" "빠뜨려지는" 두 동사가 모두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하는 행동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쓰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 떠올랐다. 선지자 요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원수들이었고 구원받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인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의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 항구도시로 도망가려고 했다.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가 탔던 배에 있는 선원들과 승객들과 비싼 하물들이 실족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요나 때문에 하나님이 일으키신 예기치 않은 풍랑으로 고통했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마침내 요나는 자신 때문에 이 폭풍이 일어난 것이라고 고백하고 연자 맷돌을 목에 감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바다에 던지우라고 선원들에게 부탁했다. 그들은 "여호와여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욘 1:14)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놀랍게도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쳤다. 그들은 요나를 통해서 실족할 뻔 했지만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요 1:16)라고 기록될 만큼 그 사건으로 인하여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는 믿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요나서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바다 속 뿌리까지 가라앉았다고 묘사했다. 시적인 표현이겠지만 요나서 2장 6절에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라는 표현과 오늘 본문 6절에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이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헬라어 3인칭 수동태 사역동사인 "katapontisthe"의 뜻이 "to be sunk"라는 점에서 연결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요나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지는 않았지만 (맷돌을 목에 매었다면 요나를 삼킨 물고기도 바다속으로 가라않았으리라) 깊은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것이다(실제로 밑바닥까지는 내려가지 않았지만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흥미롭게도 "실족"으로 번역된 영어 단어는 "stumble"이다. "관계의 걸림돌 극복하기"(이관직, 두란노, 2017)라는 책에서 사용된 걸림돌은 영어로 "stumbling block"이다. 반댓말은 "stepping stone"이다. 같은 돌이지만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려운 대인관계를 대처해가는데 통찰을 준다. 본문에 예수님이 언급하신 연자 맷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곡식을 빻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을 깊은 바다에 빠뜨리워서 살아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종종 미제 살인 사건으로 사람을 죽이고 시체에 무거운 돌이나 쇳덩이를 달아서 저수지나 강에 던져서 증거인멸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족의 헬라어 단어는 영어 "스캔들"(scandal)의 발음이 같고 어원이 같다.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가 16장 23절에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You are a stumbling block to me)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건 이후에도 예수님을 자칫 실족하게 할 수도 있었던 행동을 했다. 예수님이 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멀찌기 떨어져서 불을 쬐다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뒤돌아보셨고 그는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다. 수제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가 스승을 저주까지 했을 때 그것은 사람들에게 스캔들이 될 수 있었다. 오죽 예수님이 평소에 잘못 가르쳤으면 수제자가 그 정도 수준 밖에 되지 못했을까? 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또 다른 제자 가룟유다는 평소에 예수님을 실족하게 할 수도 있는 제자였다. 그만 두라고 잘라버릴 수도 있는 제자였다. 평소에 회계 업무를 맡아 관리하면서 공금을 사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을 예수님이 모를리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만 두라고 자를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마침내 가룟유다는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은화 30개에 팔아넘기는 배신을 했지만 그의 스캔들, 즉 걸림돌을 인류의 가장 핵심문제인 죄를 대속하시는 디딤돌로 삼으셨다. 마귀는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예수님에게 찾아와 돌이 떡이 되게 명하여 먹으라는 걸림돌을 제시했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걸림돌을 극복하셨다. 마귀는 마침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스승을 팔도록 함으로써 그가 걸림돌이 되게 했지만 예수님은 극악한 사형수들을 처벌하는 스캔들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원 사역을 이루심으로 수치의 십자가가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십자가로 바꾸셨다. 걸림돌이 디딤돌이 된 것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어 문자적으로 순종한다고 자신의 한쪽 팔을 자르거나 한쪽 눈을 뽑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무만 보고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면 이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과민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불안과 수치심, 죄책감을 느껴서 내적인 갈등이 심하며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소위 신경증 증세가 심한 환자들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늘 본문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연자 맷돌이 된다.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말씀을 부분적으로 읽고 행동에 옮길 수 있다. 젖먹이 수준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연결지어 연자 맷돌을 목에 걸어준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무게의 무거운 맷돌을 걸어준다. 이런 이들은 스스로는 매우 양심적으로 살려고 한다고 하지만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마귀는 이런 자들에게 어떤 노력과 방법으로도 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눈을 가리며 귀를 막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의 메세지가 이런 자들에게 꼭 필요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whoever)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목에 걸린 연자맷돌을 예수님은 풀어주신다. 

 

오늘 본문에서 큰 그림을 보아야 나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첫번째 큰 그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아무리 미천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수치스럽게 하거나 스캔들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시각도 그랬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을 소중하게 보는 눈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축복을 기대하고 여인들이 자기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을 귀찮다고 쫓아내기도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꾸짖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이 타인들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낮은 자, 세상에서는 미천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연결된 자는 모두 귀한 존재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가르쳐주는 큰 그림이다. 예수님이 존귀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결된 모든 자는 부자나 가난한 자는 차별없이 귀한 존재로 대우받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며 기독교적인 정신이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잘 지적하였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약 2:5-6).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정신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잘 말씀하셨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5-46). 

 

본문이 말하는 두번째 큰 그림은 A<B의 부등호로 표시될 수 있는 지혜이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여러번 이 문학적 방법으로 지혜로운 삶과 선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예를 들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의 말씀에서 무엇이 더 나은지를 듣는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하여 불편한 것, 손해나는 것을 포기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이 사실을 잘 보여주셨다. 거지 나사로는 비록 세상에서는 거지로 살고 피부에 피부병이 있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다. 대조적으로 부자는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며 건강하게 살았지만 죽은 후에 지옥에서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을 혀에 찍어 주면 좋겠다고 간청할 만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몸의 일부를 잃어버리더라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유지하며 이 땅에서 살다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훨씬 더" 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낫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8).

 

사람들은 무시할 수도 있을 만큼 낮은 위치에 있거나 미천한 자로 여겨지며 심지어 스캔들처럼 대우받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little ones)는 예수님이 동일시하시는 "좋은 대상"이다. 예수님에게는 존귀한 자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 10절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특히 자기애성 성격장애적인 요소가 많은 현대 크리스천들은 10절 말씀에 경고를 받고 자각해야 한다. 성격장애로 인하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안하무인(眼下無人)"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죄를 날마다 짓고 살 수도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날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솔로몬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모습 중에 첫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교만한 눈"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잠 6:17).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교만한 눈을 가진 채로 살다가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눈을 잃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백배, 천배 나은 일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신다.

이관직 교수, 전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현 이관직 상담실 대표, kleecounsel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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