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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2025년 11월 1일 새벽 

본문: 마 14:13-21

제목: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비참한 죽음 소식을 접한 예수님이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지만 그곳에 큰 무리가 다시 모여들었고 자신을 배척했던 고향과는 멀리 떨어진 빈들에게 소위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사건을 소개한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독일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과 같은 사람들은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한다.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며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성경을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설명하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늘 본문도 비신화화한다. 예를 들면, 무리들이 각자 다 도시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로 눈치만 보다가 한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리자 자신들의 도시락을 꺼내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는 식이다. 이들은 신학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고치신 것이라고 했던 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들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보리빵과 물고기를 손에 올려놓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다고 마태는 기록했다. 이 표현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장면과 오버랩된다. 떡을 떼어 주시면 그것인 세상을 위하여 주시는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은 요한도 기록했다(요 6:1-15). 요한은 본문의 시기를 언급한 것이 흥미롭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 6:4).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사건이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이 사건을 기록한 후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2-33). 이어서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I am"의 표현을 쓰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유대인과 상종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과도 상종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같은 말씀이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오늘 본문은 이적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많은 무리 앞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떡을 배불리 먹음으로써 만족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들을 사망에서 죽음으로 "단번에"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삶으로 인도하게 하는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의 사건이자 능력이다.


백성들은 이 떡을 먹고 예수님을 정치적인 리더,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요 6:15 참조). 자신들의 실존적인 문제를 당장 해결해줄 수 있는 초인(超人)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영생에 대한 관심보다 이생에 대한 관심이 훨씬 많은 자들임을 아셨지만 그들의 필요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젖먹이와 같은 수준임을 아셨고 그 수준에서 공감적으로 반응하셨다. 제자들도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제자들도 무리의 마음을 공감했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5절). 제자들도 배가 고팠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고픔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공감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백성들의 표정에서 지치고 배고프고 아픈 모습을 읽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누구도 예수님이 이 빈들에서 이적을 베풀어달라고 요청한 자가 없었다. 이전 이적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적을 베푸신 것을 목격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은 광야에서 돌을 명하여 빵을 만드시는 기적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마귀보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첫 시험을 하면서 사십일을 금식한 후에 주린 예수님에게 창의적인 이적을 행하라고 유혹했다. 돌들을 명하여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약 이만 명에 해당하는 큰 무리들 앞에서 팔레스타인의 광야에 있는 돌들에게 명하여 빵을 만드시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했다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만큼 놀랐을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화학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면 돌이 빵이 되는 물리적이며 화학적인 변화도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능력을 연극성적으로(histrionically) 사용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았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무리 중에서 제자들이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그의 손에 올려놓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祝辭)하셨다. 예수님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를 향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온 몸이 상하고 깨어졌을 스데반의 눈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눈에는 하늘 보좌에 계신 성부 하나님이 보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 장면에서 자신이 세상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며 옆구리가 로마 군병의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심으로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주실 것을 내다보셨으리라. 


떡을 떼어 열두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열두 광주리에 남은 떡조각이 가득 찰 정도로 넉넉히 먹고도 남은 이적이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노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백인이나 황인이나 흑인 등의 차이에 전혀 차별이 없이 모두 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배불리 먹는 은혜를 받는 것을 보여준다.이 부분에서 다윗의 시편이 연상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원수 마귀가 보는 앞에서 천국 잔치 상을 차려 주시고 "구별된 자"로 "성도"로 인정하며 확인하는 표식으로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신다. 우리의 잔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넘치는 은혜를 우리는 입었다. 가진 것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우리의 잔은 넘치는 잔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sufficient)  대속적 죽음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심지어 그들 중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 자는 이미 영생을 가진 천국 시민으로 사는 은혜를 입은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믿고 고백하고 영접한 자이다. 요한복음 3:16절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천국을 소유한 자는 바울의 고백처럼 몸은 세월이 갈수록 늙어가고 쇠퇴해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outwardly) 낡아지나(wasting away) 우리의 속사람은(inwardly) 날로 새로워지도다(being renewed)" (고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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