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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들을 공감하고 배려한 사람들

2025년 11월 6일 새벽 

본문: 마 15:29-31

제목: 병자들을 공감하고 배려한 사람들 


예수님과 제자들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다시 갈릴리 호숫가로 복귀한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자리를 잡고 앉으시자 큰 무리가 그에게로 왔다.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산상보훈으로 말씀하셨던 장면과 오버랩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예수님은 모여온 큰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을 것이다. "자리에 앉으셨다"는 표현에서 강론하려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 대신 치유하시는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이어지는 32절의 내용을 고려할 때 이 무리들과 예수님은 적어도 사흘간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다."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32절). 그 산에서 노숙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집에 갔다가 다시 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에게 자신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대답하신 내용이 있는 선행하는 본문과 연결할 수 있다. 개로 불림을 받은 가나안 여인과 그의 딸도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었음을 예수님이 그녀의 청을 받아들여 딸의 귀신들린 것을 고쳐주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주인이 있는 개였으며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 또다른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등장한다. 그 양들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이었다. 단수처럼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복수형이다. 즉 다리 저는 사람들, 장애인들(the crippled),  맹인들, 말 못하는 사람들(the mute)과 기타 여럿(many others)이다. 게네사렛 동네 사람들이 주변 동네에 두루 다니며 각종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도우미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태는 큰 무리가 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예수님의 발 앞에 앉혔다고 기록했다. 


군중은 이기적이기 쉽다. 개인적으로는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집단이 되면 그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려는 성향이 인간 심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군중은 각자가 자신이 가능하면 예수님 근처에서 말씀을 듣고자 서로 밀치거나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 에스겔 34장에 표현된 것처럼 힘센 염소들이 약한 양들을 밀치거나 맑은 물을 먼저 먹고 물을 발로 밟아서 흙탕물로 만드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큰 무리의 사람들은 약한 양들이 먼저 예수님의 발 앞에 가까이 가서 고침을 받도록 오히려 인도했다. 그들의 행동에서 천국 백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오래 전에 침신대 상담학 교수를 지냈던 정동섭 교수님이 상담을 정의하면서 "좀 덜 아픈 사람이 좀 더 아픈 사람을 돕는 과정이며 좀 더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 좀 더 치유가 필요한 사람을 돕는 과정"이라고 강의한 내용이 오늘 아침 불현듯 기억이 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큰 무리는 상담사의 마인드가 있는 무리였다. 그들은 좀더 치유가 필요한 양들을 먼저 배려하는 공감적인 마음을 품은 무리였다. 예수님의 발앞까지 온 많은 병자들도 무질서하게 자기가 먼저 치유받겠다고 밀치고 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모습은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 행각에 누워있는 많은 병자들 중에서 경쟁에서 살아남은 오직 한 명만 치유되는 살벌한 환경에 처해 있던 병자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요 5:4). 38년이나 병과 씨름해온 병자의 경우 그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서 누워 있었다. 물이 움직일 때에 그를 들어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각종 병자들은 큰 무리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앉아 있는 자리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배려를 받은 것이다. 가장 약한 자가 배려받고 환대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데 이 언덕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제일 늦게 포도원에 들어와 한 시간 일한 노동자에게 포도원 주인은 제일 먼저 품삯을 주어 돌려보내었을 뿐 아니라 하루치 품삯을 주는 배려와 환대를 했다.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일수록 약자와 장애우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주차장 제도나 계단 대신 경사로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배려는 성경적인 정신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산에 모여온 큰 무리는 각종 병과 씨름하던 병자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광경을 "직관(直觀)"하는 은혜를 누렸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앞을 보게 되었을 때 환성을 지르며 기뻐할 때 온 무리가 함께 기뻐했을 것이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걸인이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일어나 걷게 되는 기적을 경험했을 때 보였던 반응을 보면 무리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8). 마태는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는 현장에서 함께 기뻐하며 놀랐던 무리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The people were amazed)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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