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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겔의 성전세

2025년 11월 17일 새벽 

본문: 마 17:24-27

제목: 반세겔의 성전세


이 본문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본문이며 주로 대화로 이루어진 본문이다. 녹취록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한 후)

성전세 받는 자들 1: "너희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

베드로 1: "내신다"

(가버나움에 살던 그 집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들어간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먼저 말을 붙이셨다)

예수님 1: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 1: "타인에게니이다"

예수님 2: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오늘 본문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반세겔"이다. 개역개정판에서는 "반세겔 받는 자들"이라고 번역한 부분을 NIV 영어성경 에서는 "the collectors of the two-drachma temple tax"라고 번역했다. 세겔(shekel)은 이스라엘에서 지금도 통용되는 화폐단위이며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헷 족속에게서 매입할 때에 "은 사백 세겔"을 달아주었다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화폐 단위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은화 단위이다. 드라크마는 드라크마 비유에서도 사용된 예수님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의 화폐 단위였다. 본문 내용으로 볼 때 한 세겔이 네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었다. 한 과부가 성전에 두 렙돈 (헬라식 동전)(한 고드란트, 로마식 동전, 3-4 천원 가치에 해당됨)를 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녀가 부자들이 드린 헌금보다 더 많이 드렸다고 하면서 그것이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다고 말씀하기도 했다. 포도원비유에서는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단위가 사용되었는데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식 화폐단위였다. 한 데나리온은 한 드라크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전세 반 세겔은 두 드라크마(데나리온)였고 이틀치 품삯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금액에 해당했다. 


성전세의 기원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를 처음 조사하면서 스무살 이상 되는 남자들이 내어야 했던 "생명의 속전"(a ransom for his life)였다. 수효를 조사할 때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 30:12)라는 말씀에서 다윗의 인구조사에서 질병이 생겼던 부분적인 이유를 추론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반 세겔로 정해주시면서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15-16절)라는 말씀하셨다. 다른 제물의 경우와 달리 성전세는 모든 인간의 가치가 동등함을 잘 말해준다.


성전세는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이 3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때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삭개오와 같은 세리장들이 세금을 거두러 다녔던 것은 로마 제국에 내야 하는 세금을 걷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로마제국에 내는 관세나 국세와는 별도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성전을 출입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독자적으로 징수할 수 있도록 로마가 허용해준 것이 성전세였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반 세겔 받는 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나"라고 질문한 것은 예수님에게 걸림돌을 놓기 위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 22:17)라고 직접 질문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연결된다. 예수님은 그 때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라고 대답하셨고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가져왔을 때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그들에게 질문하셨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라고 대답하심으로써 그들의 이중구속적인 질문에 대해서 역설적인 대답으로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으셨다. 이 말은 나중에 정교분리를 잘못 이해하고 주장하는 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 성전세를 요구한 자들은 예수님에게 직접 묻는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의사소통을 하려면 직접하는 것이 맞는데 말이다. 그들은 좀더 말하기가 부담이 적었던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라고 질문함으로써 "삼각구도"(triangle)의 의사소통을 했다. 아니면 베드로로도 성전세를 아직 내지 않은 상태인 것으로 보이는데 차라리 "베드로, 당신은 올해 성전세를 내지 않은 것으로 나오네요.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반세겔의 성전세를 받느냐 안 받느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중구속적인 상황에 빠뜨리는 것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16장에서 예수님은 멋진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꾸어 부르셨는데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의 원래 이름으로 부르셨다. "시몬아". 이전에 고기잡이하던 어부 시몬에게 낚시를 하는 방법으로 성전세를 내게 하신 것도 예상을 뒤엎는 접근이었다. 아무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상 임금들이 관세와 국세를 받은 대상 중에 그들의 자녀들이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물으셨다. 베드로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바로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성전세로부터 면제되는 대상들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신 적이 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관례를 따라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다가 성전에서 계속 머무르는 바람에 부모가 예수를 찾는 해프닝이 있었음을 기록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의 부모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누가는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기록했다. 비록 헤롯 왕이 재건한 성전이지만 그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었고 예수님에게는 "내 아버지의 집"이었다. 심지어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이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는 성전임을 밝히셨다. 따라서 성전의 주인인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예수님과 연결짓기가 된 제자들도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다.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성전세를 더 이상 낼 필요가 없다. 이미 성전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대속물(ransom)로 주셔서 성전세를 모두 다 갚으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신약의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밝혔다. 예수의 영인 성령이 내주하시는 거룩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게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전세를 내라고 가버나움까지 찾아와서 걸림돌을 놓는 종교지도자들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so that we may not cause offense)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와 자신의 성전세에 해당하는 한 세겔을 내셨다.


내시는 방법이 매우 흥미롭다.예수님은 평소에 회계 업무를 담당하며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가룟유다에게 지출하도록 하지 않으셨다. 베드로에게 가버나움 해변에 나가 낚시를 해서 제일 먼저 걸리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한 세겔 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한 세겔로 예수님과 베드로 몫의 한 해분 성전세를 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는 나머지 결과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언급하지 않는다. 나머지 제자들의 성전세에 대한 언급도 다루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첫번째 낚시에 걸린 물고기에 한 세겔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아이러니가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좇은 이후에 물고기를 잡은 적이 없었다.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고 다른 세 제자들(안드레, 야고보, 요한)들도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이후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도 여러번 하고 해변에서 말씀도 들었지만 다시 그물을 잡거나 낚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물을 다시 잡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후에도 좌절한 채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밤을 새운 날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방법도 아니고 베드로의 옛 직업을 기억나게 하는 낚시를 하라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것도 미신적인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한 세겔을 충당하시는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다.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면 또다른 이적을 베푸신 것이다. 표적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에게 개인적인 이적을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스로 향해 지중해를 항해하던 배에서 그 큰 바다의 어느 한 지점에서 요나가 바다로 던져졌을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그를 산 채로 삼키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셧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그리고 그를 사흘 후에 육지에 토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두 사람 몫의 성전세에 해당하는 한 세겔의 은화를 뱃 속에 삼킨 한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베드로가 던진 낚시에 첫번째로 물도록 하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하신 이적을 베푸셨던 것이다. 재미있는 상상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물고기가 한 세겔의 은화를 물고 있는 채로 낚시의 미끼를 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 물고기가 정말 재수없이 베드로가 던지 낚시바늘에 코가 꿰이거나 비늘에 걸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미끼를 물려고 입을 벌렸다면 은화는 갈릴리 바다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은화를 물 정도의 입이 큰 물고기라면 물고기 크기도 작은 사이즈는 아니었으리라. 한 세겔이라는 적지 않은 액수의 은화를 누군가 가버나움 해변에서 잃어버렸을까? 밀물때 밀려온 고기가 해변이 물에 잠기면서 먹는 것인 줄 알고 삼켰을까? 갈릴리 바다를 향해 한 세겔의 은화를 장난 삼아 던진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 물고기가 받아서 삼킨 것도 기적같은 일이다. 마치 요나가 대서양의 한 가운데서 바다로 던져졌을 때 큰 물고기는 정확한 지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마태의 의도는 이와 같은 지나칠 정도의 상상력을 펼치는데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태가 이 본문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세상 임금들보다 훨씬 위대하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마태복음을 읽는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 예수님의 삶의 일면을 본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하루치 품삯의 여유돈도 가지지 않고 매일 매일의 삶을 염려없이 사셨던 모습 말이다. 유다가 평소에도 공동경비로 사용하는 돈주머니에서 도적질을 하는 바람에 돈이 별로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두 벌 옷도 가지지 말고 돈주머니도 갖지 말고 전도하러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그런 삶을 사셨음을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비천한데도 처할 줄도 아시고 넉넉한 상황에도 처할 줄 아시는 자족의 삶을 사셨다는 점에서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교훈을 준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여전히 염려하며 걱정하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세미한 음성이 오늘 본문에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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