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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기도

2025년 11월 14일 새벽 

본문: 마 17:14-20

제목: 믿음과 기도 


변화산 이야기와 오늘 본문의 귀신들린 아들 치유 사건과 예수님이 두번째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신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 같은 장에서 같은 순서대로 다루었다. 마가는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해주신 사건에 대해서 마태보다 좀더 상세하게 정황을 기록하여 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마태는 믿음의 중요성을 부각했고 마가는 기도의 중요성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보완적으로 도움을 준다. 누가는 이 사건을 목도한 무리의 반응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다른 두 복음서 기자와 차이점을 보인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And they were all amazed at the greatness of God) (눅 9:43).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변화산에 나타났던 엘리야 선지자의 믿음과 기도가 생각났다.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영적 전투를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그는 이미 "내가 비를 내리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전투에 임했지만 제단에 그 가뭄에 구하기도 힘든 물을 네 통의 물을 채워다가 세번이나 제묵과 나무 위에 붓고 난 후에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고 기도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열상 18:37). 그리고 비가 오지도 않는데 아합 왕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열상 18:41)라고 말한 후에 그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 그리고 일곱번이나 그의 사환에게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고 시켰다. 마침내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음 구름이 일어나나이다"라고 보고하는 사환의 말을 듣고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라고 말을 전하게 했던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했던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루 밤을 변화산에서 보내셨음을 알 수 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대화하신 예수님은 아마도 그 전에 제자들과 기도하러 올라가셨을 것이다. 평소에도 산에 홀로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 기록한 복음서의 내용을 미루어 보면 이런 추론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미 마태복음 16장 21-28절에서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을 언급하신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에 평소에 자주 기도하러 가셨던 올리브산(감람산)에서 올리브유를 착즙하듯이 땀이 피처럼 배어 흐를 정도로 필사적으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변화산에서 십자가를 내다보고 기도하셨을 것이다. 사십일 금식하면서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도왔다면 변화산에서의 기도 시간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의 기도를 도왔을 것이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예수님을 본 제자들과 무리들은 압도적인 경이감으로 놀랐다고 마가는 기록했다. "As soon as all the people saw Jesus, they were overwhelmed with wonder" (막 9:15).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사십일간 교제한 후에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가려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를 덮었던 구름이 걷힌 후에 일상의 예수님 모습으로 되돌아왔지만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압도적인 경외심에 휩싸였던 것이다.


산 아래로 세 제자와 함께 내려오신 예수님에게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아 있던 제자들도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간청하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향하여 과용될 만큼 유명한 말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때 아이의 아버지는 즉시 큰 소리로 고백했다. "내가 믿나이다(I do believe)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막 9:24). 이 아버지의 고백은 모든 신앙인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모순적으로 들리는 말이지만 모든 신앙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신앙적이다. 믿음이 연약할 뿐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백퍼센트 유지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감정과 기분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기도 한 것이 성도들의 현주소이다. 


산 밑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실제로 귀신을 쫓아낸 적도 있었다(마 10:1 참조).그러나 이 경우에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조용히 따로 질문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마 18:20)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덧붙이셨다. 이 두 대답을 연결짓기하면 모순적인 것처럼 들린다. 씨중에서 가장 작은 씨라고 알려져 있는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앞에서는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거의 없다시피 한 작은 믿음만 있어도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는 말씀인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던 그 아버지의 고백도 겨자씨만한 믿음에 해당되는 믿음은 아닐까? "믿습니다"를 여러번 복창하고 "아멘 믿습니다"를 여러번 고백하고 집 앞에 있는 산에게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고 명령하면 과연 옮겨질 것인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마치 광야에 있는 많은 돌덩이를 향하여 떡이 되게 명하라고 유혹한 마귀의 말과 별 차이가 없게 들릴 수 있다. 이 부분을 쓰면서 양평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 가 세워질 때에는 여러 개의 터널이 뚫리기 전이어서 서울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강변을 따라 꾸불꾸불한 길을 사용해서 운전해야 해서 시간을 많이 걸렸는데 터널이 여러개 뚫리는 바람에 드라이브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다는 학교 당국자의 간증을 들은 기억이 났다. 당장에 산이 옮겨지는 역사는 아니었지만 터널이 뚫림으로써 마치 가로막고 있던 산이 옮겨지며 탄탄대로가 열리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내용이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오늘날도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신적이며 맹목적인 신앙이 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자칫 변질되며 이상한 가르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신사도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가 금을 씌운 이로 변하라고 명하면 금니로 바뀐다는 식의 비이성적인 신앙에 의존할 위험이 있다. 아무리 기도하고 믿음으로 고백해도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즉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행하실 큰 그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품고 매일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수년째 아무런 응답이 없는 기도제목이 있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남북으로 분단된 지 거의 8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지만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기도해온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떤 기도의 제목은 살아있는 동안 응답되지 않기도 한다. 어떤 기도제목은 응답되지 않는 것이 응답이 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마가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는 말씀을 기록함으로써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믿음과 기도가 분량이 차야 한다고 가르치는 분들도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칫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처럼 들려질 수 있고 하나님의 주권성보다 인간의 노력과 경건생활을 더 강조하는 말로 오해될 수도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소화해야 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살전 5:17 참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큰 뜻과 큰 그림을 신뢰하는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명적인 병으로 고통하는 가족을 위하여 병낫기를 기도했다가 병이 낫지 않고 죽게 될 때 실망하고 믿음의 길에서 떠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젖먹이 수준의 신앙에서 머물러서 그럴 것이다. 병이 낫는 것이 반드시 치유적인 것은 아니다. 히스기야 왕은 치유되지 않고 죽었더라면 유다의 멸망의 재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치유된 후에 낳았던 아들이 악한 왕이 되었다. 아이러니이다. 기도하되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며 신뢰하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가졌던 태도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평소보다 일곱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불 속에서도 그들을 건지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신앙인의 자세이다.오늘 묵상에서는 귀신들린 아이의 증상이나 고침받은 사건 자체를 다루지는 않았다. 내일 묵상에서 같은 본문으로 좀더 묵상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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