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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서기관의 고백과 예수님의 반응

2025년 9월 18일 아침 

오늘 아침 마주한 본문은 마태복음 8장 18-22절이다. 이 본문을 두고 한참 묵상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 9장 57-62절도 읽어보고 이어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지나가면서 겪은 풍랑 사건을 기록한 본문이 기록된 마가복음 4:35-41절, 누가복음 8:22-25절 말씀도 읽었다. "따르다"(follow)라는 동사가 마태복음 8장에 4번 등장하는데 본문에서 두 번 등장한다. 한 서기관이 자발적으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를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내용에서 등장하고 다른 한 제자가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요청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한 부분에서 등장한다. 나머지 두 번은 1절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에서 사용되며 23절에서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에서 사용된다. 

  본문에서 한 서기관과 다른 제자가 따른다는 의미는 "제자의 삶을 산다"는 의미인 반면에 무리와 제자들이 따랐다는 의미는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전자의 따름은 제자의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따름은 개별적인 좇음인 반면 후자의 따름은 다수의 좇음이라는 점에서도 대조를 이룬다. 

  SNS 시대에 팔로워가 많다는 것은 지명도와 영향력과 직결된다. 구독자 수가 유명 유튜버들과 무명 유튜버들을 구분짓는다. 특히 유튜브는 구독자 수와 조회 수가 재정적인 수익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팔로워들이 매우 필요하며 중요하다.

  본문에 등장한 무명의 한 서기관이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많은 무리 앞에서 고백한 것은 영향력이 있는 고백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엘리트층에 속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고 따라다녔던 다수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달리 이 서기관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을 맹세한 것이다(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본문에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서기관의 고백 사건을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22, 23)는 말씀과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기기로 굳게 결심하시고"(9:51)라는 말씀 뒤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9:57)라는 고백을 배치한 점이 마태와 대조를 이룬다). 이 서기관의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둔 유월절 잔치 사건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과 연결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본문 앞에 등장했던 무명의 로마인 백부장의 고백에 대해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무명의 서기관의 고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마저 느껴지며 듣기에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오미가 룻에게 모압으로 오르바처럼 "돌아가라"라고 대답한 것을 연상시킨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서기관의 고백은 적어도 겉으로는 룻의 고백에 준하는 고백이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서기관의 반응에 대해서는 마태와 누가 모두 침묵한다. 어쩌면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기롭게 맹세한 베드로의 실제 수준을 잘 아시고 그의 맹세에 대해서 칭찬하시지 않았던 것처럼 이 서기관의 중심을 아신 예수님께서 칭찬 대신 그의 제자가 되고자하는 동기를 점검하도록 직면하셨다고 볼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요청한 다른 제자의 경우에도 그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초대에 대해서도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 마태와 누가 모두 침묵한다. 서기관이나 또다른 제자의 자리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서도록 하는 마태와 누가의 의도일 수 있다. 서기관이나 또다른 제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지적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무명의 서기관과 무명의 제자의 모습은 내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을 때 모습을 기억하게 했다. 부산대 공대 4학년 봄학기 재학 시절 성찬식 현장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나는 이 무명의 서기관이 했던 고백, "주님,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주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 대신 부끄럽게도 "주님, 신학대학원에 가고는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처럼 목회는 하기 싫습니다. 대신 공대 대학원 진학해서 공대 교수가 되는 것보다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유학해서 신학교수가 되는 것이 주님도 좋고 저도 좋지 않겠습니까?"라는 일종의 협상을 하고 총신대에 진학했던 것이다. 그런 젖먹는 수준의 나를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담임목회의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지금까지 신학교수로서 살도록 허용해주셨다. 그 서원 후에 서너달도 못되어 1981년 8월 10일 삼랑진(?)에 있는 낙동강에 부산 반송제일교회(현 새누리교회) 주일학교 선생들과 하기성경학교 마친 후에 낚시하러 갔다가 수영하는 중에 익사 직전까지 간 사건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구조과정을 통해 물에서 건짐을 받음으로써 "침례받은 장로교인"이 되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은 체험을 통하여 그때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은혜 베푸심을 처음 직접 체험하면서 뒤돌아보는 일이 없게 해주신 것이 은혜이다. 뭍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교회 1년 후배 여선생(얼굴을 기억하지만 이름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과 물에 빠진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 헤엄쳐 와서 위기의 순간 모험해준 교회 동기이자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교 동창인 최영철 집사(연락이 끊어진지가 꽤 오래 되었다. 수소문한 적도 있었는데 찾지 못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이메일로 연락주면 좋겠다. kleecounseling@gmail.com ) 가 없었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두 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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