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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는 일과 푸는 일

2025년 11월 23일

본문: 마 18:18-20

제목: 매는 일과 푸는 일 


오늘 본문은 앞뒤 문맥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면 다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본문임을 알 수 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16장에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마 16:19 참조). 베드로에게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땅에서 매거나 푸는 것이 교회와 연관성이 있음을 유추해서 생각하게 한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의미를 찾는 열쇠는 16장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천국 열쇠"라는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열쇠가 있으면 자물쇠가 있다. 열쇠는 잠겨 있는 특정한 자물쇠를 푸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 열쇠란 천국을 여는데 사용되는 열쇠라고 볼 수 있다. 이 열쇠는 하늘에 있는 천국과 땅에 있는 천국인 교회를 연결지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과 연결한다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교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예수님과 연결된 모임이며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모임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은 선행절인 16절에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는 말씀과 연결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매는 것과 푸는 것의 첫번째 의미는 죄를 범한 형제를 죄에서 풀어내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그를 죄의 매임으로부터 풀 수 있는 방법은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고하는 것이다. 그래도 듣지 않을 때에는 한 두명을 더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증언을 하는데 유효한 최소한의 숫자 두명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두세 사람이 가서 그들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면서 그 형제의 죄를 확인하며 권고함으로써 만약 그가 회개하면 그는 죄의 매임으로부터 풀려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권면한 자들은 권면을 받는 자를 천국문을 열고 그를 인도하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자로 쓰임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찾아갔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보이지 않은 예수님의 영이 임재하셔서 죄를 회개하는 형제를 죄에서 풀어주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중요한 내부적인 사명 중의 하나는 믿는 자들 중에서도 죄에 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며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평행과정(parallel process)이 일어나는 곳이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다. 그곳은 어디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가 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곳에도 임한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은 각 성도가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들으신다. 은밀한 중에 행한 일도 갚아주신다.


매는 것(to bind)과 푸는 것(to loose)의 두번째 의미를 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후반절 말씀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나오는 말씀과 비슷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원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서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연결되는 것을 "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첫번째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매는 것이 연합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두 사람이 연합하며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에서 땅과 하늘이 연결된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마음과 힘을 합치며 연합하며 일치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연합하며 사랑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요한복음의 말씀에서도 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최소한 두세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교회공동체가 가진 능력의 의미를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을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요약하면 "맴"과 "품"의 두번째 의미로 본다면 교회 공동체가 연합하거나 분열되는 것은 땅의 이슈에서 그치지 않고 하늘의 이슈와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역동성은 교회 내에서의 관계만 아니라 개인과 부부관계에도 그대로 접목될 수 있다. 부부가 연합하여 힘든 가운데도 멍에를 같이 지고 인내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 부부와 가정이 구하는 바를 이루어주실 것이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세번째 의미는 21-35절까지 긴 분량을 차지하는 만 달란트 빚진 신하 비유와 연결할 때 발견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의 비유를 말씀해주셨다.이 비유는 죄를 지은(빚 진) 형제에게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되겠느냐고 질문한 베드로에게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고 대답하신 후에 이어 하신 비유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신하의 빚을 탕감(蕩減)해준 왕이 베푼 용서처럼 서로 서로에게 빚진 것을 탕감해주는데 있음을 알려주셨다.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는 개인이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상징한다 (달란트는 20년치의 노동자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따라서 40년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저축해도 두 달란트 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한 신하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의 돈을 왕이 빌려주었다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라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을 빚을 졌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빚진 죄를 갚는 것은 인류의 그 누구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임을 알려주셨다. 처음에 그 왕은 신하에게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대답했다. 다 갚겠다는 약속은 일단 모면하기 위해서 한 거짓 약속이었다. 왜냐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갚을 능력이 그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왕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 왕은 그 엄청난 빚을 다 취소(cancel)해주고 그를 방면했다(let him go). 용서해준 것이다. 왕은 그를 옥에 가두고 매는 대신 풀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 신하는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노동자의 백일치분 급료에 해당됨) 빚진 자를 찾아가 만나서 "붙들어 목을 잡고"(He grabbed him and began to choke him)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 동료도 이 신하가 왕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과 말로 반응했다. 엎드려 간구하며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그 동료를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분노하여 그를 다시 불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말하며 그를 옥에 가두었다는 말씀으로 이 비유는 끝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라고 비유를 해석하고 적용해주셨다. 이 비유와 연결하면 땅에서 매는 것과 푸는 것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이 용서와 관련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함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교회는 용서하는 공동체이다. 누룩과 같이 죄가 교회공동체에 번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교회공동체가 죄를 지은 형제나 자매를 권면하고 회개하도록 돕고 그가 회개할 때 회복시키며 용서하는 것이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자 사명이다. 심지어 일곱번씩 일흔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교회는 지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곱번씩 일흔번, 아니 그보다 더 많은 횟수로도 용서하시며 기회를 다시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신앙생활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우리가 우리의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성도들은 서로 용서하며 용서받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가치있는 보혈로써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처럼 긍휼과 자비로 탕감받았음을 늘 자각할 때 백 데나리온 빚진 이웃이 끼친 상처와 빚을 탕감해줄 수 있다. 아마도 만 달란트 빚진 신하는 자신이 정말로 탕감받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힘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백 데나리온이라도 받아서 왕에게 갚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신하는 안타깝고 어리석은 자다. 탕감해주었다고 선포한 왕의 말을 자기 머리로 해석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우리의 제한된 두뇌로 믿어지지 않을 때에도 거짓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아멘으로 응답하고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이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과 연결된다는 점을 말씀해주셨다. 그런데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와 연결해서 본다면 하늘에서 먼저 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땅에서 풀어야 하며 또한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본적인 노력이 신앙의 첫 출발점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의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복음이다. 하나님이 먼저 풀어주셨음을 잊어버리면 땅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용서하기가 어렵다.일반 용서심리학에서 과학적으로 검증해낸 바도 있지만 이 땅에서 매며 한을 품고 사는 사람은 매는 것과 한을 품는 것이 가학적(sadistic)이기에 앞서 자학적(masochistic)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용서심리학자들이 규명한 것처럼 용서하며 풀며 사는 것이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서 용서하며 푸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나름 의미가 있고 유익하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실용적 유익을 넘어서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죄 용서의 수혜자임을 인식함으로써 그 어떤 자도 용서하며 살아야 할 당위성을 갖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게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살리며 자유롭게 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매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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