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죄를 다루는 절차와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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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2일 새벽
본문: 마 18:15-17
제목: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죄를 다루는 절차와 원리
18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죄"에 대하여 여러 각도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첫번째 경우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책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절)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7절).
이 땅에 태어나 그 누구도 관계하지 않고 살면 타인을 실족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완전히 구별짓기 하며 살면 가족이나 친구 또는 교회 성도들에게 상처줄 일이 없을 것이다. 상처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거라사의 광인이 생각난다.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다. 귀신들린 상태에서 취한 행동으로 인해 수없이 가족을 괴롭혔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자신도 고통스러웠으리라.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그를 통제하기 위하여 쇠고랑을 채웠지만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만큼 모두가 무력한 상황에서 살아야 했다. 그나마 그가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더 이상 실족시키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방법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무덤 사이에서 독처(獨處)하는 것이었다. 밤낮으로 괴성을 질러도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단지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위협을 느꼈을 뿐이다.솔로몬은 부부갈등이 심해서 서로가 실족하고 자녀들에게도 고통을 줄 때에는 극단적인 구별짓기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잠언을 남겼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 이 잠언처럼 거라사의 광인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에서 사는 편이 나았다.
시인 정호승의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라고 상처의 보편성과 불가피성을 노래한 시처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상담하다보면 종종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대물림할까봐 아예 결혼을 하지 않거나 자녀를 낳지 않으려는 이들을 만난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이다. 인생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삶이다. 옛말에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담지 못한다"는 말처럼 상처를 줄까봐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나무 몇 그루만 보고 큰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족이나 타인을 실족하게 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입을 완전히 닫거나 관계를 아예 하지 않고 섬처럼 살거나 아예 죽는 것이다. 죽은 자는 실족하게 하는 법이 없다. 실족당하지도 않는다. 성격장애들 중에서 "조현성(분열성) 성격장애(schizoid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진 사람들은 거의 사람들과 연결짓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거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공감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상처를 주지 않는다. 자신은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와 법적으로 연결된 가족들은 사실상 고통을 겪는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완전히 끊고 "정서적인 단절(emotional cut-off)"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화(woe)가 있다." 서로 연결짓기 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삶에서 서로 실족시키거나 실족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풀도 바람에 스치면 서로 상처가 생긴다면 인간관계에서도 당연히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생은 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연적인 화이다.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깨어졌고 죄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실족당하며 실족하게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실족하면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가능하면 타인을 실족하지 않도록 의식하고 배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두번째 경우는 이틀 전 묵상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는" 경우이다. 예수님은 "찍어 내버리라"는 극단적인 처방책을 주셨다. 이 처방전은 실족하게 하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의 치명적인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소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손이나 발을 찍어 내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손발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입도 없고, 두 눈도 다 빠지고 두 귀도 다 잘린 괴물이 될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노래한 시인 윤동주이 가졌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몸의 한 부분도 제대로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양심에 털이 나거나 죄인식이 전혀 없거나 병식(病識)이 전혀 없는 싸이코패스나 조현병 환자와 같은 사람들만 멀쩡한 몸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9절)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죄가 영생과 지옥 불로 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지옥 불과 영원한 불(8절)로 간다는 사실을 경고하신 것이다. 문자적으로 범죄한 손이나 발을 잘라낸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 전체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다. 범죄한 눈을 뽑는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죄성이 인간의 세포에 각인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인간은 이 땅에 살아 숨쉬는 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의 손과 발이 잘리는 대신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자신을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혈관에 예수님의 피로 수혈을 해야만 우리는 거듭난 존재가 되며 영생을 가진 자로서 이 땅에서 살 수 있다.
세번째 경우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죄를 범한 형제나 자매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님은 권면할 때 세 번의 절차를 원칙으로 제시하셨다. 첫번째 절차는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는 절차이다. 두번째 절차는 두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는 절차이다. 그래도 고집을 피우며 권면을 듣지 않을 때에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알려서 권징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 세 단계의 절차는 현대 사법제도의 삼심제 원리에 적용되어 왔고 장로교의 정치제도에도 적용되어 있다. 장로교의 정치제도에서 권징(discipline)은 개 교회 당회가 일차적으로 시행하고 여의치 않으면 노회 정치부가 담당하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총회 정치부가 담당하고 심지어 판결까지 내린다. 아무튼 예수님은 죄를 범한 자가 교회 전체의 권징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불순종할 때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나 세리를 대하여 취했던 태도처럼 그를 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완전히 구별짓기해서 대하는 극단적인 처방이 마지막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할 때 간혹 회개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극약처방이 유익할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예방적인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주셨다. 이 원리는 갈등해결 방법에서 오늘날도 유익하게 적용된다.
죄에 대해서 언급하신 네번째 경우는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질문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대답하신 경우이다. 이 경우는 선행 본문에서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경우나 눈이나 손이나 발이 범죄하게 하는 경우, 형제가 죄를 범한 경우에 제시한 방법과 모순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직접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형제의 죄를 지적하라(go and point out) 는 말씀과 용서해주라는 말씀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교회 공동체라는 컨텍스트에서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죄에 대하여 대처하는 방법을 다룬다면 베드로의 질문의 경우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하여 대처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앞뒤 말씀이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신체 각 부분이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인 교회 공동체에서 한 지체가 회개하지 않고 죄를 계속 지을 경우에 치료하고 회복하기 위하여 권면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짓는 죄는 누룩과 같아서 방치할 경우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른 지체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진단하고 치료책을 강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하다. 무조건 용서한답시고 소위 "값싼 은혜"를 주장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거룩성을 훼파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었던 음행의 이슈를 다루면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적용하여 가르쳤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을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13). 이것은 몸에 암이 발견되었을 때 전체 몸을 살리기 위해 암을 수술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잠언의 교훈처럼 허물을 가리어주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경우가 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무조건 말씀을 연결하여 적용하기 보다 어떤 접근이 더 유익하며 덕을 세우며 치료적인지를 아울러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 사실을 잘 지적하였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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