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 vs. 디딤돌
- kleecounseling
- 9월 19일
- 1분 분량
2025년 9월 19일 아침 묵상하며 쓴 글이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8장 23-27절이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이 사건을 기록할 만큼 제자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풍랑 극복 사건이다. 갈릴리 바다를 밤에 배타고 통과하면서 적어도 두 번 예기하지 못했던 바람과 풍랑으로 인하여 죽음의 위협에 처한다. 본문 외에 겪은 풍랑 사건에서는 제자들만 고생하는 중에 예수님이 풍랑 중에 갈릴리 호수를 물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의 신성을 계시하는 의미있는 사건이 되었다.
최근에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도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위기상담적인 설교를 할 때 많이 사용하는 본문이기도 하다. 인생항해에서 겪을 수 있는 위기를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태도 이 사건을 단순히 풍랑을 만나는 일이 제자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을 회람하며 읽었던 초기 기독교회 성도들, 특히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마태는 이 본문을 통하여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 겪었을 수도 있는 여러 형태의 고난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데 유익을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풍랑 사건 다음에 이어진 사건이 갈릴리 호수의 반대편 지역이었던 이방 땅 거라사에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한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이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 두 사건을 같은 순서로 연결했다.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와 "(우리가)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을 기록한데 반하여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 항해의 목적은 예수님이 거라사에 있는 귀신들린 자, 한 명을 위해 찾아가는데 있었다는 사실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신앙과 삶에 연결짓기 해보고자 한다.
첫째, 선한 사역에 "저항"(resistance) 또는 걸림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예기치 않은 어려움들이 생긴다. 상담과정에서도 변화와 치료를 원해서 상담을 받는 내담자가 중요한 변화의 변환점에서 저항을 경험하는 일이 많다. 변화로 나아가는 길에 모순적으로 변화하고 싶지 않고, 옛 삶의 방식으로 살고 싶은 무의식적인 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자연현상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폭풍우는 거라사인의 광인을 치유하시려고 찾아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길목을 막고 그들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걸림돌처럼 역할을 한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가 있듯이 저항과 걸림돌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때 덜 놀랄 수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사는데 정치적인 핍박과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핍박이라는 걸림돌에 직면했고 일부의 기독교인들은 변절하기도 했다. 나이브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선한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헤매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이들도 있다. 기독교인들의 삶에 만사형통이라는 말은 오용되어서는 안된다. 좋은 일이나 어려운 일, 또는 어떤 일조차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믿으며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만사형통이다.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만사형통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다.
둘째, 이 풍랑 사건은 제자들과 오고 오는 세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의미"(meaning) 있는 사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단지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바람과 바다도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일시적이나마 보며 깨닫게 했던, 조금이라도 믿음을 갖게 하는 사건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풍랑 사건은 의미가 있었다.
그냥 생고생한 것으로만 위기 경험이 끝난다면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생하며 고난을 겪어도 그 일을 통해서 오히려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변화와 치유가 일어난다면 그 위기 경험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 사건이 단순히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이 다치는 것과 같은 상처로만 끝나고 더 앞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뒤돌아가게 하는 "걸림돌" 사건이 되었다면 걸림돌은 마귀가 기뻐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걸림돌이 오히려 디딤돌이 되는 것이 크리스천들에게 의미가 있다. 걸림돌인줄 알았는데 디딤돌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묘미이다. 하나님의 주권하에서는 "쓴 물"조차 "단 물"로 변화할 수 있다. 돌이 떡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돌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하기에 따라 걸림돌로 끝나기도 하고 디딤돌로 쓰여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뱃고물에서 주무신 예수님의 마음의 태도를 조금은 닮아갈 수 있다. 실제로 이 모습을 보여주었던 신앙인들이 있었다. 감리교의 창시자가 되었던 존 웨슬리가 선교 사역중에 좌절하고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폭풍우를 만나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는데 일부의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하게 기도하며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신앙의 모습에 도전을 받은 웨슬리가 자신의 신앙을 재점검하여 영국에 감리교 운동을 일으키는 의미있는 사건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의 삶에도 폭풍우에 배가 거의 침몰하기 직전에 이르는 위기 사건들이 있었다. 지나고 돌아보면 분명히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사건들이었다. 무너질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풍랑 속에서 붙드셨고 오늘까지 인도해주셨음을 믿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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