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
- kleecounseling
- 11월 18일
- 1분 분량
2025년 11월 18일 새벽
본문: 마 18:1-5
제목: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
오늘 본문은 마가와 누가도 같은 문맥에서 기록한 본문이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신앙적인 질문을 먼저 던진 것처럼 기록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자기들끼리 논쟁하며 던졌던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클까?" 큰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파트 평수가 큰 집에 사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동차의 엔진 사이즈가 크고 차체가 큰 차를 타면 경차를 탄 사람이 우습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다. 키 큰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우월감을 느낀다. 1987년 여름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유학차 도착한 시카고 공항에서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로 가는 국내선 항공기를 탔을 때 느꼈던 일종의 수치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일 늦게 탑승했는데 기내에 들어섰을 때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아내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머리가 검은 동양인인 우리를 약간은 생소한듯 신기한듯 바라보는 백인들의 눈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흑인도 한 명이 없었고 모두 백인들이었다. 화란인들의 후예들이 이민자로서 와서 정착한 도시다보니 이 비행기에 탑승한 대부분의 백인들의 키가 매우 컸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었던 사울의 키가 컸다고 기록했다. "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삼상 10:23).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키 큰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텐데 사울은 그들보다도 구별될 정도로 키가 컸다. 이런 사울이 왕으로 뽑혔을 때 백성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안심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아내와 거의 매일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마을 주변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교외 지역이어서 넓은 땅과 숲 속에 집이 드문 드문 있는 지역이 참 많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집도 한국의 대부분의 집에 비하면 땅 평수도 크고 숲을 끼고 있는 뒷뜰 정원도 만족스럽고 감사하다. 하지만 멀리 산까지 보이는 전망이 좋고 넓은 땅에 위치한 집들을 보면 이따끔 집을 옮겨볼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 때도 솔직히 있다. 세상에서는 좀더 크고 넓은 것이 편안하고 좋을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도 그들 마음에는 기존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이해하며 기대한 천국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해서 이루어질 새로운 독립 국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는지 그 자격 요건에 대해서 서로 논쟁하며 다투었던 것이다. 마가는 이 질문이 제자들이 논쟁까지 했던 질문임을 밝혔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 9:33-34). 제자들의 실제 관심사는 열 두명 중에서 어떤 제자가 가장 핵심적인 권세를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을 것인가에 있었던 것이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요한은 요한대로,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속으로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 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 중에서 낙점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왜냐하면 세 명을 따로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셨고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세 명이 다 함구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제자들은 아마도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세 제자 사이에 모종의 중요한 인사위원회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들의 수준은 어제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린 아이 수준이었다. 예수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앞에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의 의미를 이어서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가와 누가는 이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은 언급하지 않고 바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라는 말씀을 언급했다. 누가의 경우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는 말씀을 덧붙인 후에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라는 말씀으로 이 사건을 끝맺었다.
내가 한때 교수생활했던 모 대학에서는 대학 전체 교수 회의를 하면 강당 규모로 큰 세미나실에서 했는데 회의장에 가면 학교 보직 서열 순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 보직명과 교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소위 누가 더 큰 자인지가 확인되는 자리였다. 좀더 힘이 있는 보직, 좀더 보직비가 많이 나오는 직책을 받기를 원했던 마음이 나에게도 없지 않았다. 총신대에 있을 때에도 여러 번 보직교수로 임명될 때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부총장까지 할 때에는 더 기분이 좋았던 것이 사실이다. 보직자회의를 하면 학교의 최신 정보와 최고급 정보를 제일 먼저 알게 되는 "특권"(?)이 있기도 했고 보직비가 생활비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은퇴한 지금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부분적인 모습이기는 했지만 참 부끄러운 모습이었음을 고백한다. 회사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승진"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감사한 일이다. 교수 세계에서도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부교수에서 정년보장 교수로 승진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감사한 일이다. 승진해야 하는데 승진하지 못하면 화가 나고 수치감 마저 느낄 때도 있는 것이 인간사이다. 중요한 것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면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에 인생을 허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한 채 삶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 인간적으로는 예수님께 더 인정받고 소위 "이너서클"(inner circle) 안에 있다는 자부심도 느꼈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고 확인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며 이 욕구가 잘 채워지면 자존감도 건강해지며 성취욕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정 욕구는 어느 시점까지만 유효한 "잠정적인 대상" 경험으로 점점 사라져야 한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마지막 해,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났다는데 문제가 있다. 처음에는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 라는 부분으로 논쟁할 수도 있고 다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 삼년이라는 세월의 끝자락에서 제자들 모두가 예외없이 이런 욕구와 씨름하고 논쟁했다는 것은 그들이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린 아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잘 보여준다.
어리면 "자기애적 욕구"가 강하게 있어서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하고 최고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발달단계에서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모습이다. 어른이 되면, 장성하면 어린 아이의 모습을 벗어야 한다. 성숙한 어른이 되면 이타적인 삶을 자연스럽게 살 수 있다. 남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을 낮출 수 있다. 낮추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잔치나 중요한 회의에서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대우받지 않으면 화를 내었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셨다. 잔치에서도 아예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상석에 앉아 있다가 더 귀한 손님이 와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까지 당할 수 있다고 덧붙이셨다.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어린 아이들과 여성들은 인구조사에서 카운트되지 않았다. 사람이지만 사람처럼 대우받지 못했던 계층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처한 "낮은 자리와 위치"를 취하는 자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역설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NIV 성경은 "이 어린 아이와 같이"라는 본문을 "whoever takes the lowly position of this child"라고 번역해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명료하게 했다.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셨다. 가장 취약한 태아의 모습으로 오셨고 태어날 때에도 말구유에 누이셨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분의 모습을 잘 표현하며 우리에게도 도전을 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은이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낮엔 해처럼 밤에 달처럼"이라는 찬양 가사가 마음에 다가와 옮겨본다.
"낮엔 해처럼 밤에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 주소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몸을 온전히 버려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나 내 맘은 아직 추하여
받은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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