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계명
- kleecounseling
- 2025년 12월 11일
- 1분 분량
2025년 12월 11일
본문: 마 22:33-40
제목: 두 계명(誡命)
사두개인들의 올무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두개인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양가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한 점에서는 같은 마음이었지만 부활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는 다른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대답을 못하게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리새인들은 적어도 부활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사두개인들의 콧대가 꺾인 것에 대해서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서 죽이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였고 모의했다. 율법에 정통한 한 율법사의 방안(方案)으로 모아지자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왔다. 그는 대표해서 예수님께 시험하는 질문을 던졌다. "랍비여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크게 분류하자면 십계명과 각종 제사법, 사회법, 그리고 윤리법(도덕법)을 주셨다.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법과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법으로 나누어진다. 각 나라에 헌법과 각종 법률이 있듯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겠다는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나라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그 율법을 순종하는 백성이 될 때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율법에 불순종했던 역사였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명시된 율법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세부적인 규정들과 관습들을 만들어내었다. 율법이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며 짐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의무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는 율법 전문가(expert)였다. 그는 율법을 꿰고 있는 자였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찾아와 올무에 빠뜨리기 위하여 시험한 것이다. 그와 그와 함께 온 바리새인들은 마음으로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율법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대답에 따르면 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를 죽이려는데 앞장 서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올무에 빠뜨리려는 그의 계획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마귀의 선봉이 됨으로써 계명을 어긴 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신 후에 이어서 율법사가 묻지 않은 답을 하셨다. 두번째 계명도 첫번째 계명과 비슷한데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두번째 계명이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이라고 대답하셨다. 이 두번째 계명에서도 이 율법사를 포함한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계명을 어긴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은 예수님을 적으로 여겼고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자로 여겨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그를 죽이고자 했다. 그들은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핵심적인 계명으로 잘 요약하셨다. 세부적인 나무 몇 그루에 집착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큰 숲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써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고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경을 세부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도 가치있고 의미가 있지만 성경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도 자칫 바리새인들처럼 살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큰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깨닫고 우리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서로 이웃에게 대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뜻을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이라고 말하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가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3-24). 사도 요한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의 삶을 삼위 하나님과 연결지으며 호흡하는 삶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연결짓기 할 때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훈의 정신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길 원하실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살면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마음의 눈을 밝히시며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관계하는 이웃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이 조금씩 조금씩 더 나타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제자들을 포함하여 우리들은 완벽주의적이며 강박적인 신앙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또 다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신앙이 자칫 율법주의적인 면으로 흘렀던 적이 있다. 나도 자랄 때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신앙생활에서 기쁘고 감사하고 자유로운 삶보다는 매이고 두렵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삶을 살았던 적이 많았다. 특히 목사의 아들로 성장하다보니 더욱 그랬다. 지금도 그런 면이 남아 있다. 다시 한번 복음의 원점(原點)과 핵심(核心)으로 돌아가 참으로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더 이웃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원한다. 주님, 오늘 본문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겨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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