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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vs. 1

2025년 11월 21일 새벽 

본문: 마 18:11-14

제목: 99 vs. 1 


오늘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길 잃고 방황하는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이 땅에 찾아오신 목자이심을 알려준다. 개역개정판에는 "없음"으로 표기된 11절이 일부 사본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로 추가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볼 때 잘 어울린다. 의사이기도 했던 누가는 의사와 병자의 비유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잘 묘사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이런 저런 대답을 하지 않고 예수님이 자문자답(自問自答) 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3절).


잃은 양 한 마리는 문맥에서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의 하나"(6절)와 연결된다. 선행하는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라는 말씀과도 연결된다. 본문 마지막 절인 14절,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와도 연결된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과 비교할 때 한 마리의 양은 "작은 자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업신"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는 하나(one)이다. 존재감이 없는 양이다. 이런 양은 없어져도 표시가 안 난다. 그런데 이사야는 우리 모두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양이었다고 잘 지적하였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We all, like sheep) 그릇 행하여(have gone astray)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 모두는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던 자들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그 길이 중간에 끊겨서 다리가 없이는 갈 수 없게 되었다. 협곡에 막혀서 건너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리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가 있었던 영적 에덴 동산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길 잃은 양이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무리에 원래부터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뿔뿔히 흩어져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들이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분명히 진단한다 (시 14:3, 롬 3:10 참조). 자신은 길을 잃은 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율법의 기준으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참 목자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우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최후 심판 비유에서 등장하는 심판관의 왼쪽에 선 염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흥미롭게도 자주 쓰시던 "내 아버지(My Father)"라는 표현 대신 "너희 아버지(your Father)"라는 표현을 쓰셨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없었던 탕자, 탕녀였다. 돼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며 살면서도 나름 행복하고 가치있다고 착각하고 살던 자들이었다. 하늘 아버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영적인 고아들이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자유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자들이었다. 양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자들이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우리는 예외없이 목자없는 양으로서 살았다.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택하신 유다 백성들이 길 잃은 양처럼 살아가고 있던 모습을 이사야서 첫장에서 다음과 같이 잘 진단하였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로다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2-4). 소와 나귀보다 인지기능이 더 떨어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의 모습은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살아가는 많은 무신론자들과 각종 종교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몸은 살아서 돌아다니지만 그 영혼이 죽은 채 살다보니 눈이 열리지 않고 귀가 열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며  사는 것이다. 얼마 가지 않으면 철로가 끊겨 있어서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상황임을 전혀 감지 하지 못한 채 열차 각 객실에서 각양각생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있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던 영화 "설국열차"는 길 잃은 양들의 종말을 잘 그려내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온 것 자체로 기뻐하며 환영하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집에 있던 탕자의 형은 동생의 홈커밍을 환영하지 않았다.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며 동생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탕자의 아버지의 심정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양을 되찾은 목자의 심정과 같다. 탕자의 아버지는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모습이라면 본문의 목자는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적극적인 모습이다. 예수님은 두 모습을 다 보여주신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에게 계시하신 모습처럼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극적인 모습도 보여주신다.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가실 수 있지만 안에서 스스로 열고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신다. 각 양의 특성을 헤아려 존중해주시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양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목자에게 돌아갈 수 없다. 불가능하다. 원래 양은 시력이 좋지 않다고 한다. 목자가 없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양우리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는 양에게 직접 찾아와서 양의 이름을 부르며 마침내 양을 품에 안아주어야 양은 양우리에 돌아갈 수 있다. 목자는 양을 찾은 기쁨에 겨워 춤을 출 것이다. 같은 비유를 기록한 누가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흥미롭게도 누가는 이 잃은 양 비유 후에 탕자의 비유를 배치하였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에게 초점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인간은 다 길을 잃은 한 마리 양과 같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은 아담 이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도 다 한 때 길을 잃고 방황했다가 목자가 찾아서 양 우리 안에 들어온 양들이기 때문이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을 표상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대속함을 받고 회복된 양들이다. 


여전히 양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말씀해주셨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먼저 양우리에 들어온 자들은 아직 양우리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긍휼심을 갖고 기도하며 전도하며 선교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 모두가 한 때 길 잃고 방황하던 한 마리 양이었으며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구원해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선물을 받았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잘 상기시켜준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all of us also)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Like rest, we were by nature deserving wrath)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1-8). 은혜받은 자답게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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